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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Jun 19. 2023

마중물은 무엇인가

- 여러분의 마중물이 되어!

 독서를 할수록 나의 절망적인 어휘력에 놀란다. 책에서 반추, 퍼그, 사주식 침대, 젠체하다, 이젤 등의 어휘가 등장했을 때 주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없었다. 상식이라는 의미일까?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마중물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국어사전만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도 어려운데 마중물이 등장한 문맥은 과학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중물
명사. 펌프질을 할 때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하여 위에서 붓는 물.
- 표준국어대사전



 마중물을 붓는 과학적 설명은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예전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고 요즘 이들은 관심이 없어서일까? 다행히 원리는 간단했다. 주사기나 빨대 속으로 물이 올라가는 원리를 떠올리면 된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주사기는 무한정 당길 수 없고 빨대를 빠는 호흡은 제한이 있다. 1미터짜리 빨대를 상상해 보자. 첫 번째 호흡에 물이 30센티까지 올라왔다. 두 번째 호흡을 재빨리 충전하지 않으면 물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펌프의 원리는 호흡과 호흡 사이에 내려가게 될 물을 '기압'을 이용해서 붙잡는 것이다. 입 속에 들어간 빨대의 끝을 혀로 막고 있으면 물이 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혀로 빨대 구멍을 막고 호흡을 충전한 후 다시 빨아들이면 입도 펌프다. 펌프 부품으로 혀가 들어가 있다면 흥미로웠겠지만 구조는 아래와 같다.

퍼올릴 때에는 빨대의 원리와 동일하다.

이때 A에 빈틈이 있다고 해보자. 용기와 입술 사이 노출된 빨대에 균열이 있는 셈이다. 주사기 피스톤이 헐거운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날 수동식 펌프의 피스톤은 정교하지 않고 마모와 손상이 많았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도저히 물을 퍼올릴 수 없었다. 마중물이 그 '빈틈'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주사기 피스톤이 헐거우면 고무를 덧붙이고 빨대의 균열을 손가락으로 막는 행위가 마중물의 원리다.


 피스톤이 내려갈 때, 즉 호흡을 충전할 때에는 A를 열고 B를 닫은 후 피스톤을 올렸던 만큼 제자리로 내려다 놓는다. 물을 붙잡은 상태에서 피스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기술'이 펌프의 핵심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주사기를 당겼다가 밀었을 때 바늘로 물이 새지 않고 피스톤만 내려가게 만든 것이다. 그림이 부실하여 링크를 덧붙인다. <나무위키 펌프>




"국민의 마중물이 되겠다."

"마중물로써 희생하여 민생을 이끌겠다."

"나는 마중물처럼 보잘것없지만 결실은 클 것이다."


 마중물은 정치권에서 흔한 어휘다. 마중물의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아이러니한 표현들이다. 마중물이 썩은 물이든 토사물이든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마중물의 오염이 걱정이다. 어휘는 생명을 갖고 있다. '안마방'은 마사지를 받는 곳이지만 사람들은 다른 것을 떠올린다. 문신과 타투는 같은 의미인데 조폭이 하면 문신이고 대학생이 하면 타투다. 카레와 커리도 동일한 음식이지만 마케팅의 영향으로 카레는 저품질 커리는 고품질로 변질되었다. 이대로라면 마중물은 정치용어로 정착될 것이다. "너의 마중물이 되어줄게."라는 수줍은 고백의 답장이 "너 정치에 관심 있어?"가 될 수 있다. 어휘를 빼앗기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유는 읽고 쓰지 않아서다. 전 세계 역사의 공통점은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문자 습득을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읽고 쓰지 않으면 피지배층이 된다는 호들갑이 아니다. 우리의 오늘은 역사로 기록될 것이며, 우리의 역사만 '예외'가 되리라는 근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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