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
오전 6시. 산책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 앞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남성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의 옆을 지나칠 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가 그를 앞지르자마자 뒤에서 "통통~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1초나 2초 정도 자그마한 분노를 느꼈다. 그를 향해 돌아서는 나의 뒷모습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제스처였을 것이다.
정면에서 본 그는, 아니 그 할아버지는 80대는 되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뒤돌아선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그러더니 "통통~하다. 다리도 통통해."라고 말했다. 데자뷔는 아니지만 20대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나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왜 그러세요. 저 아세요?" 할 말을 잃은듯한 상대는 얼버무렸고 나는 젊음의 승리를 만끽했었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할아버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 할아버지를 다시 앞질러서 걸음걸이를 빨리했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샘솟았다. 내가 생각하는 내면의 성숙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할아버지 일찍부터 운동하시네요?"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는 악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치매였다. 인적 드문 곳에서 80대 할아버지가 30대 남성을 도발했다면 그거야말로 정신이 이상한 거다.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 남들보다 5년은 먼저 시작했던 비대면의 영향일까? 방구석 사색과 독서는 실전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문득 아버지의 모습도 겹쳤다. 아버지는 요즘 세상이 말하는 '선비'의 집합체다. 여전히 족보를 소중히 해야 한다고 말하신다. 낯선 젊은이에게 "통통하네."라고 하실 것 같진 않지만 객관적이고 크나큰 단점이 있다. 공공장소에서 트림을 하신다. 아버지를 불편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젊은이의 눈빛은 내가 오늘 그 할아버지를 보던 눈빛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도 자식이 있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의 자녀도 우리 아버지에게 똑같은 눈빛을 보일까?
책 한 권을 읽은 것보다 많은 생각을 했다. 글쓰기는 경험에서 나온다는 말이 가슴을 후빈다. 나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사람과의 접촉이 없다. 정상적인 삶이었다면 글이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사회적 고립이 글쓰기까지 고립시킨다고 생각하니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