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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Dec 15. 2023

독서 백스물한 권째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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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프래질>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Antifragile)은 걸그룹 르세라핌의 히트곡 제목이다. 르세라핌을 알기 전까지 어디서도 못 들어본 단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래질(Fragile)의 뜻은 '연약한', '깨지기 쉬운'이다. 반대말은 무엇일까? Unfragile? Strong? 책에서는 '취급 주의' 스티커가 붙은 택배를 예로 든다. 취급 주의의 반대가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라면, 긍정의 반대는 중립이어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긍정의 반대는 부정이다. 다시 말해 취급 주의의 반대는 거칠게 다루라는 소리다. 안티프래질을 이해하면 르세라핌의 수록곡 '히드라'의 존재를 납득한다. 히드라는 목이 잘리면 절단면에서 2개의 머리가 생성되는 괴물이다. 목이 두껍거나 잘려도 아프지 않은 '강건함'과는 확연히 다르다. 여담이지만 르세라핌은 날개가 여섯인 천사다. 6인조로 데뷔했지만 한 명이 탈퇴하여 5명이 되었다. 저번에 읽었던 <장미의 이름>에서 알게 된 정보다. 독서는 어떻게든 효과를 낸다.


안티프래질과 히드라


 철학과 경제학이 뒤섞인 자기 계발서다. 저자의 메시지가 타당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세상을 보는 관점을 늘려준다. 저자는 사람들이 의학과 과학의 발달로 프래질해졌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에 찬성하지만 경계가 불확실하다. '호르메시스'의 딜레마 때문이다. 호르메시스는 고통이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는 이론이다. 예방접종은 일종의 호르메시스다. 고산지대 사람의 풍부한 폐활량도 호르메시스다. 하지만 일관성이 없다. 중금속을 소량씩 축적한다면? 독을 얼마나 먹어야 적절한 내성이 생길까? 이러한 논점은 자녀의 양육에서도 나타난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나약해!" 꼰대의 헛소리로 보이겠지만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얼마 전 파리를 보고 기겁하는 꼬마를 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파리와 함께였다. 나방과 메뚜기도 기겁할 만큼 낯설지 않았다. 잠자리와 나비를 두려워하는 20대를 봤을 때 "그럴 수 있지!"라고 여겼다. 나의 부모세대는 쥐를 무서워하는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봤던 우리의 부모세대는 강건했을까? 조상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여섯 살 때 우리 집 담장 옆에서 굶어 죽은 시체를 봤어!" 고통배틀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프래질해지고 있다. 프래질은 한 번에 무너진다. 개미와 초파리 따위에도 기겁하는 세대가 등장했을 때, 느닷없이 마주친 고양이 사체는 정신이상과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이를 무턱대고 내모는 선택도 환영받지 못한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아이가 쥐에게 물리면? 책임은 누구에게? 호르메시스의 딜레마다.


 저자는 프래질한 우리가 한 번에 붕괴할 것이라 경고하며 안티프래질을 호소한다. 다수가 생존하려면 소수의 희생은 필수라 말하는 자연의 법칙은 진리다. 이러한 사상을 따라가면 보수의 가치관에 도달한다. 관점을 늘려주는 책은 언제나 환영이다. 재미가 없더라도 말이다. (이 책은 재미가 없다.) 늘어난 관점은 중용을 찾는 일을 돕는다. 논점의 황금비율에 가까워지면 적을 향한 잔인함이 줄어든다. 타협은 인과 없는 양보보다 관점의 공유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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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시스템> - 스콧 애덤스

 스콧 애덤스는 만화 <딜버트>의 작가다. 심슨은 알겠는데 딜버트는 뭐지? 검색을 했더니 익숙한 그림체가 보였다. 한국에도 연재된 적이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자기 계발서'다. 실패를 기회로 삼았다는 도입부는 공감하기 힘들었다. 식품 사업, 애니메이션, 레스토랑 등 수십 가지 도전에 실패하고도 거지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딜버트의 인세가 있었다. 설득력을 갖추려면 딜버트 이전의 실패만 다뤘어야 했다. 유색인종 우대 정책 때문에 자신(백인남성)이 불이익을 받았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뭐, 백인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 스콧 애덤스는 121번 책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미 만평 '딜버트', 작가 인종차별 발언에 신문서 퇴출>


 시스템을 다루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의지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주장. 설탕의 금단 현상을 회를 마음껏 먹으며 중화시키자는 이론이다. 버티기만 한다면 설탕 중독은 항상성에 의해서 제자리를 찾는다. 설탕 생각이 덜 나면 회 섭취를 줄인다. 어쨌든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시스템을 하나 둘 구축해 나간다. 회 중독에 빠지기는 어렵다. 돈이 없으니까. 신박한 이론이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기는 어렵다. 대체 보상 없이 설탕 중독을 벗어나는 데에는 엄청난 의지력이 필요하다. 그 정도 의지력을 지녔다면 설탕 중독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화 딜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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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김정선

 "내용적으로 작가의 영민함들이 돋보여지도록 구성되어진 멋진 책들 대다수 중의 하나의 것이다." ~적, ~의, ~것, ~들, 수동 등. 집착하면 힘들다. 외면하면 엉망이다. 어쩌라는 거야?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읽고 한동안 글을 못썼다는 어느 작가의 일화가 떠오른다. 작법서를 볼 때마다 글쓰기가 두려웠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어떻게 쓰더라도 완벽한 문장은 없다. 쓰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 얇은 책이고 예문이 훌륭하다. 소장하여 두고두고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에게 혐의를 지우는 자료들 중 대부분을 경찰에 넘긴 사람이 바로 그의 동생이었다.
그에게 혐의를 지우는 대부분의 자료를 경찰에 넘긴 사람이 바로 그의 동생이었다.

'자료들 중 대부분'을 '대부분의 자료를'로 바꿔야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건 자료이지 대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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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 필립 로스

 유명한 작가라고 들었다. 기대보다 별로였다. 또! <호밀밭의 파수꾼>과 겹친다. 이쯤 되면 미국에는 호밀류 소설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해설을 찾아보면 심오한 무엇이 있을 게 뻔하다. 궁금하지 않다. 보나 마나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무수한 감성과 숨겨진 의미를 논하면서 극찬하고 있을 것이다. 독서 초반에는 부족한 독서량 문제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제 119권 째다. 이 정도 읽었으니 효과를 봐야 한다는 투정이 아니다. 독서 119권은 아무것도 아닌 게 맞다. 문제는 감수성과 공감능력이다. 문학 감각은 타고나는 걸까? 처음 읽는 소설이 <울분>인데 재미있고 감명 깊다는 후기를 보면 허탈하다. 취향 문제로 일축하기엔 너무나 빈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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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 - 토드 메이

 121번 책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의 감수자가 이 책의 저자 토드 메이다. 읽어야 할 책과 관련이 깊다는데 안 고를 수가 없었다. 성격 탓인듯하다. 좋은 선택이었다.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에서 토드 메이가 언급될 때마다 집중력이 높아졌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상대적으로 지루했다. 1장을 제외하면 기후변화나 동물학대문제가 대다수다. '품위'라는 철학은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현대사회는 어떠한 철학을 적용시켜도 정답을 고를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적절한 합의점을 고민한다. 저자는 고민의 과정이 품위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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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마이클 슈어

 웃기는 철학책이라며 추천을 받았는데 유머코드가 안 맞는듯하다. 그래도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보다는 재밌었다. 토드 메이의 책을 읽어서인지 3장까지 언급된 도덕철학이 머리에 쏙 들어왔다. 같은 분야 책을 연달아 읽는 효과는 일타강사보다 낫다. 마이클 슈어는 넷플릭스의 <굿 플레이스> 제작자다. 넷플릭스 구독자라면 썸네일이 익숙할 것이다. <굿 플레이스>는 2화까지 보다가 재미없다며 꺼버렸는데 제작자의 책을 읽다니,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읽고 나서 <굿 플레이스>를 재생했다. 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 어쩌구저쩌구..."라는 대사가 배경음악으로 들렸는데 이제는 자막에 집중한다.


넷플릭스 굿 플레이스

 썸네일 무슨 일인가. 저게 어딜 봐서 도덕 철학인지. 미국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의 골자는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과 유사한데 후반부로 갈수록 마이클 슈어의 철학이 가미된다. 마이클 슈어는 롤스의 <정의론>에 나오는 '무지의 베일'을 좋아한다. 무지의 베일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사회를 창조한다고 해보자. 자신이 어디에서 어느 인종으로 탄생할지는 랜덤이다. 평생 동안 노예로 살 확률이 99%인 사회는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배층이 과도하게 부유하지 않은 사회, 최악의 경우라도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되는 사회, 의무와 권리가 균등한 사회를 원할 것이다. 그러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다. 정의론은 유토피아를 만드는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 CEO의 급여를 책정할 때 내가 CEO가 되든 노동자 되든 인정할만한 보상을 도출하자는 의도다. CEO의 급여와 노동자의 급여가 같은 세상은 정의론이 원하는 사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CEO의 급여가 노동자보다 100배 1000배 많은 현대사회도 정의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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