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취미로 하던 스포츠에서 꽤나 소질을 보여서, 몇 번 신기록도 세웠었고 여러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사실 돈이 안 되는 분야라 다른 현실에 부딪히며 그만두게 되었지만, 내가 가진 그릇의 크기에 비해 과분한 경험들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대회에서 상장을 받는 찰나의 순간은 분명 행복한데, 집으로 오면 항상 아쉽고 찜찜했다. 국내에서 1등을 해도, 세계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굳이 찾아낸 열등감으로 내가 가져야 할 자부심을 완전히 가려버린 것이었다.
분명 여기저기서 인정도 받고,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혼자 아쉬워하고 내 기록에 좌절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가끔 지인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누군가 나에게 해주는 '대단하다'는 칭찬에 나는 '에이,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엄청 많아'라며 불필요한 겸손을 내비쳤다. 남이 굳이 태워주는 비행기를 마다하다니. 정말 '바보 같은 겸손'이 따로 없었다.
또 나는 노래를 잘 못 부르는데, 완전 음치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부르기 자체를 정말 좋아했다. 매일같이 혼자라도 코인노래방에 가서 한 곡이라도 불러보고, 잘 부르는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주위 노래를 잘하는 친구에게 배우기도 하고. 나의 가장 큰 취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작년 말, 우울증에 평소보다 더 깊게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도 오랜 시간 동안 내 취미가 되어 준 노래가 문득 부르기 싫어졌다. SNS에서나 주위에서나 생각보다 흔하게 보이는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냥 멋지다, 부럽다에서 그쳤었는데, 갑자기 그들의 노래와 내 노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그것도 그냥 비교도 아니고, '이 사람의 반도 못하네', '반의 반도 못하네'와 같은, 비관에 더 가까운 비교였다. 지금까지도 그 취미를 되찾을 수 없게 되었을 정도의 좌절이 수반했다.
게다가 제정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그 당시의 나는 '노래 안 부를래'라는 결정에 굳이 살을 덧붙이고 덧붙이며 이런 끔찍한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뭔가에 도전한다는 것은, 내가 뭘 또 못하는지 알아내는 과정인 것 같다."
나는 어디서 어떻게 뛰어도 항상 나는 놈이 있어 쉽게 좌절하곤 했다. 아마 비교가 성취도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어릴 때부터 작용한 결과일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비교만큼 쉽게 좌절을 주는 수단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비에 홀딱 젖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비운의 주인공'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를 조금이라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나의 실수와 무기력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방어구가 아니라 완충제였을 뿐, 결국 마음 속에 쌓여 더 큰 먹구름을 몰고 왔다.
같은 상황에 대해 굳이 나 혼자 부정적인 해석을 하고 상처받았던 것은, 우울의 결과임과 동시에 우울의 원인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어쩌면 구태여 좌절하는 방법을 찾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