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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Jul 23. 2022

광팔이를 아시나요?

'아 그거 저희가 고민중입니다. 당연히 해야죠~ 곧 진행할겁니다!'

'안그래도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가 그 부분은 심도있게 고민중입니다. 물론 저희가 지원해야죠~'

'결정만 해 주시면 저희가 해 보겠습니다!'

'그 내용도 당연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지원할께요~'

'열심히 채용중입니다. 사람만 채워지면 바로 진행합니다!'


Getty Images


담당 전무는 오늘도, 타 부서 현업들을 모아놓고 위와 같이 일장연설 중이다.

다 된다고 한다. 아무튼 다 할 수 있다고.

자기는 전문가고,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그러니, 당연히 다 해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한다. (외부 요청을 그대로 다 들고오는 그의 별명은 ‘자동문’이다.)


팀 실무자들은 뒤에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다.

(솔직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문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애가 탄다. 분명 저 많은 허언들은 자기들에게 미션으로 돌아올텐데. 현재 진행중인 운영업무와 개선사항들로 검토조차 힘든 상황이다. 추가 채용? 능력 있는 사람들은 지원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 채용이 급하니, 정말 아무나 뽑아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상한(?) 사람들, 20년차에 가까운 관리자들, 위에서 꽂아넣은 낙하산들만 모여든다. (보통, 팀장급 이상이 땡겨오는 사람들 중 실무급은 거의 없다. 호형호제하는 고연차들만 모여든다.)


'하아.. 또 저러시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시나...'

실무자들은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링크드인에 접속하는 시간만 점점 늘어난다.


담당 전무. 그는, 일명 '광을 팔고' 있는거다.


광을 팔다.

영어로는 'show off' 라고 한다. ('허세부리다'로 표현하면 될라나.)


'showing off'를 하는 사람들은 두 경우로 나뉜다.

먼저, 무능 혹은 무책임한 직무유기의 경우다. 그는 팀의 명확한 R&R, 팀이 할 수 있는 일의 사이즈 혹은 볼륨 등을 모른다. 팀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현재 방향과 팀원들의 역할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걸 할 수 있는 능력도 노력도 없는 경우다. 실무진과 깊은 면담 혹은 미팅을 몇 달에 걸쳐 심도있게 진행해도 모자랄 판에. 오로지 윗사람하고만 대화하고 높으신 분의 의중을 살핀다. 외부 도메인 및 서비스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팀원들을 지켜줄 생각은 없다. '우리 직원들은 왜 이렇게 일을 안하지? 다들 놀고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악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역량이 부족한 것일 뿐. 혼자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는데, 정작 왜 안되는지 본인은 잘 모른다.


두번째는, 공명심에 사로잡힌 출세주의의 경우다. 자리 보전도 해야 하고, 진급도 하고 싶으니 안되는 걸 억지로 꾸역꾸역 포장해서 실적으로 올리고 싶다. 실제로 되는지, 혹은 언제 될지 등은 상관 없다. '일이 되고 있는 듯한' 모습만 주변에 보이면 된다. '고민중이다.' , '깊이 공감한다.' 등의 이야기로 운을 뗀 뒤, '얼른 관련 담당자를 채용해 진행하도록 하겠다.' 라고 일이 되어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기획자를 닥달해 그럴듯하지만 추상적인 상위 기획 문서를 만들어가지고 다니며 광을 판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누가 물으면,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 '인력이 부족해서' , '주변 팀들이 배타적이어서' , '팀원들의 역량이 받쳐주지 못해서' 등등 남 핑계를 대기 바쁘다. 몇 달 후에는 해당 프로젝트는 조용히 사라지고, 다음 먹거리로 눈을 돌려 열심히 포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니, 몇 년 전부터 이거 해주신다고 약속만 해주시고 진척이 없잖아요~"

"저희가 그 부분은 해드릴 수가 없어요, 도대체 누가 그런 약속을 했는지, 제발 이름 좀 알려주세요 ㅠㅠ"

광팔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위와 같은 대화가 자주 오고간다.

우리가 그런거 해줄테니까 걱정말라고 공수표를 남발하던 임원들이 바람에 날리듯 사라지고,

하위 실무자들은 이 부서, 저 부서로 흩어지고 난 후,

남는 것은 현업들의 아우성 뿐이다.


"그 땐 다 된다면서요! 아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된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ㅠㅠ"

뒤늦게 합류한 신규 입사자들은, 누가 남발했는지도 모르는 공수표를 받아들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IMF 시절 횡행했던 '어음 돌려막기' 와 유사하다. 그 끝은 국가부도였지.)


요새 유행하는 데이터,AI,플랫폼,글로벌,통합 등 그럴 듯한 단어들이 명확한 실체 없이 들어가면 (한창 데이터 어쩌고가 유행이었다.) 광파는 거다.

6개월, 아무리 늦어도 1년 내에 작은 실현 가능성도 없다면(얘기하면서도 안되는거 알잖아?) 일단 광파는 거다.

실무진들이 공감하기 힘든 내용(관리자나 임원들이 주로 이러고 다닌다.)도 일단 광파는 거다.

당장 진행할 사람이 없는데 떠들어대는 것도 광파는 거다. 채용해서 진행하면 되지~ 하면서 떠드는데, 그렇게 급하다고 대충 아무나 뽑고, 낙하산 데려와 앉히니 회사가 그 모양 그 꼴이 난거다. 누굴 채용해야 할지는 제대로 아는가? 친한 지인들 낙하산으로 데려다 앉히는 건 채용이 아니다. 그건 배임에 가깝다.

그림이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다 싶으면(회의 참여자들도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그냥 앉아있는거다.) 광파는 거다.


몸집은 가볍게, 움직임은 민첩하게, 유연하면서도 물흐르듯 운영되어야 할 현대 조직에서, 겉만 번지르르한 장기 계획은 실현될 가능성이 낮다. 더군다나 하루가 멀다하고 추세와 판세가 뒤집히는 이런 빠른 시대에는 더더욱. 3년 후에 만들어질, 혹은 5년 후에 구동될 (아니, 사실 안될 가능성이 높지만 말도 안되는 희망회로로 일단 광을 팔고 보는) 계획은 불확실성이 너무 높다.

작은 성취를 통해 조직 구성원과 팀의 발전을 불러올 수 있는, 실현가능하고 구체적인 프로젝트들을 '될 때까지' 이것 저것 시도해보는 것이 오히려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을까?


고스톱을 쳐보면 알겠지만,

'광을 판' 사람은 게임 플레이어에서 제외된다.

즉, '죽는다'는 이야기다.

광을 팔고 받는 그 작은 금액을 기대하고 '광팔이'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패를 받고 플레이 해 승부를 볼 것인가?

그건 우리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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