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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Jul 30. 2022

책임은 누가 지나요?


'이 부분을 빨리 결정해주셔야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어서 정해서 알려주세요.'

라는 코멘트가 지라에 달렸다.

분명히 길게 이야기를 직접 나눴고, 그 결과 및 방향에 대한 의사를 내러티브를 포함한 장문의 글로 설명드렸다. 더불어 진행 권한을 위임한다는, 잘 부탁드린다는 개인적인 당부까지 마친 상황. 그런데 또 결정을 해 달라고 한다. (전화로 연락해야 할지, 이메일로 통보해야 할지 방식을 결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디까지 상세하게 정해서 알려달라는 걸까.

왜 지시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걸까.

얼마나 자세히 명령받길 원하는 건지, 혹시 오늘 점심 메뉴도 내가 정해드리면 되는 걸까?

(이메일로 통보하시죠. 라고 정해드리면, '폰트와 줄간격은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할까봐 두렵다.)


왜 그럴까? 라는 고민을 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원래 수동적이고 지시받는 걸 즐기는 사람으로 태어났을리는 없지않은가.

먼 옛날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노동'도 '추위'도 '배고픔' 도 아니었다. '자유 의지의 상실'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고 한다. 원래 노예 처럼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저렇게 하나하나 결정해 지시받기를 원하는 것에, 분명히 이유가 겠지.


무서운거다.

잘못됐을 때 책임을 묻고, 죄를 따지고, 벌을 주는 것이 무서운 거다.

그래서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실무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윗선에 의사결정을 요청한다.

어떤 회사는 이 '의사 결정'을 아무도 해주지 않아, 파트장 -> 팀장 -> 실장 -> 그룹장 -> 담당임원 ->  대표 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다들 벌벌 떨고 결정하지 못한다. 일이 잘못되어 '벌 받을까봐' (여기에 마이크로매니징 을 일삼는 임원이 하나라도 껴 있다면, 실무자들은 절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마이크로매니징이 이렇게나 무섭다.)


답답했다.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그런 와중에, 스티브 잡스의 'DRI' 에 대해 읽게 됐다.

애플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고 진행할 수 있는 '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 (DRI)를 두고 프로덕트를 운용한다. 실무를 모르는 관리자가 최종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연하다. 해당 프로덕트에 대해 매일매일 몇 년을 고민한 '실무자', 그리고 수십개의 프로덕트를 오로지 관리만 하는 단순 '직책자'의 지식 수준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직책자'(보직간부?)의 지식은 어디에서 왔을까? '주간업무보고'가 전부 아닐까?)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단순 '관리자'에게 맡긴다? 지식도 없는? 치열한 전쟁터와 다름없는 이 바닥에서, 그런 방식은 부대원을 전멸시킬 수도 있는 최악의 결정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의 일하는 문화를 가진 회사를 꼽아보라면, 단연 '토스'를 이야기하고 싶다. (국내에서 이만큼 '문화'에 대한 고민을 하는 회사가 또 있을까.) 토스의 문화 소개 문서에 DRI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 가져와본다. (출처 : https://blog.toss.im/article/toss-team-culture)


최종의사결정권자 (DRI)

완전한 위임을 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최종적인 의사결정권자임을 의미합니다.
최종 의사결정권자를 우리는 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을 줄여 DRI*라고 부릅니다. 최종 결정을 한다는 것은 독단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정보와 의견 속에서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경청하는 것이 모든 DRI의 가장 중요한 직무능력 중 하나입니다.
* DRI(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는 Apple Inc.에서 차용한 개념입니다.

DRI가 충분한 경청 후 결정을 했다면, 만약 누군가 그 결정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결정에 승복하고, 그 결정을 지지하며 그 결정이 옳은 결정이 될 수 있도록 모두가 도와줍니다.


위와 같은 '문화'가 제대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기본 전제가 필요하다. 그냥 대충 DRI를 도입해서는 절대 굴바른 방향으로 굴러갈리 없다. (독재자 탄생?) 가장 중요한 기본 전제는 '신뢰에 기반한 권한의 위임'이다. 다시 토스의 문화 소개 문서를 살펴보자.


‘위임‘과 ‘신뢰’가 핵심입니다

훌륭한 분을 모셔서 맡은 일에 대해 완전히 위임함으로써 자율성이 지켜집니다. 위임된 일에 대한 결정은 직급이 높거나 팀에 합류한지 오래 되었어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런 위임을 통해, 자신의 일은 스스로가 독립적으로 의사결정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참여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자율과 책임, 위임에 따른 업무 문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신뢰를 쌓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뢰는 주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는 점에서, 먼저 주변 팀원들에게 신뢰를 얻을 만큼의 역량과 열정 그리고 주도성을 보여주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DRI는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팀원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권한의 위임이 이루어지고, DRI는 실질적으로 구동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오늘부터 DRI니까, 전부 내 말 들으세요!" 라고 해봤자.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팀원의 믿음, 신뢰를 충분히 얻어야 비로소 의사결정권 이라는 위험하지만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쥘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속 의사결정권자는 어떤가?

조직장 : "아 몰라! 그래서 니 맘대로 하고 싶다는거 아냐!"
            "맘대로 해! 대신 잘못되면 알아서 해! 니가 다 책임져!"

실무자 : "..."


DRI는 책임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다. 결정을 했으면 결과를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책임'은 위에 예시로 든 대화처럼 '징계'나 '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무릎꿇고 사죄하길 바라는건 아니잖는가?)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을 진다는건,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팀과 회사에 더 나은 결과로 이바지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권한을 위임받고, 의사결정권자가 된 것이다. 책임은 그런 의미다.


'이 부분을 빨리 결정해주셔야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어서 정해서 알려주세요.' 라는 지라 코멘트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왜 이렇게 일 할 수 밖에 없는지, 실무자가 두려워하는 분위기는 왜 생겨났는지. 혹시 내가 원인인지. 나는 왜 문화를 개선할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한다.
나부터 변화해야 한다.

열정을 바탕으로 솔선수범하여 신뢰를 쌓고, 권한을 위임하여 자율과 책임의 문화가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우리도,
실무자가 직접 의사결정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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