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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Jan 06. 2024

'솔로몬의 위증'을 읽다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

미야베 미유키는 '화차'라는 소설로 처음 만났다. 당시에 소설을 읽으며 받았던 충격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故 이선균 배우님이 주연을 맡았던 그 영화 '화차'의 원작이 맞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상상했지?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갈 수 있다니, 그 천재성에 감탄했다. 물론 세간의 평가처럼 미야베 미유키의 글들은, 히가시노 게이고 처럼 읽기 쉬운 스타일은 아니다. 조금 더 진지한 버전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어찌보면 조금 지루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만큼 다 읽고나면 여운이 길고 진하다. 아무래도 어두운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특유의 내용 때문이리라.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벼운 조깅이라면, 미야베 미유키는 마라톤에 가까운 느낌. 좋고 나쁨을 가를 순 없다. 조깅도 마라톤도 모두 몸에 좋은 운동임이 분명하니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답게, 이야기가 대체로 무거운 편이고 어둡다. 오히려 그런 면이 내 취향일런지도 모르겠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것은, '화차', '모방범', '낙원', '가모저택 사건' 정도였다. 그의 작품은 호흡이 길어서 선뜻 손대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한 작품이 두 권 혹은 세 권으로 이루어졌고, 한 권당 두께도 만만찮아서 시작하기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된다. '낙원'과 '모방범'도 두 권과 세 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이었는데, 긴 책이었음에도 당시 밤을 새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선택한 작품은 '솔로몬의 위증'. 미야베 미유키가 <소설 신초>에 9년에 걸쳐 연재한 작품이다. 9년 동안 연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꾸준함의 끝판이구나. 무엇이든지 꾸준하게 하는 사람은 존경받는다. 이 책은 총 3권. 번역본 기준 원고지 8,500매라고 하니, 한 권당 스토리의 길이도 만만찮다.

세 권을 나란히 놓으니, 겉표지의 길이 연결된다. 읽을 땐 몰랐다.


쉬지 않고 읽었다. 다음 이야기가 참을 수 없어서 계속 읽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역시, 대단한 작품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쫀쫀한 짜임새는 물론이거니와, 긴 호흡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작가의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자칫 잘못하면 유치해질 수 있는 10대 중학생들의 이야기를 비웃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표현하는 힘에 경탄했다. 특히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훌륭했다. 너무 구체적이지 않게, 하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와 닿을 수 있게 만드는 데 놀랐다. 'ㅇㅇ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라던가 'ㅁㅁ는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외쳤다' 라는 식의 직접적인 감정 표현이 아닌, 상황과 동작, 표정 등을 간결하게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점이 탁월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조금 더 세련됐다고 할까나.


재미있는 작품이다보니,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었다. 보고 싶지만. 참아야겠다. 혹여 감동을 깨뜨리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고, 화면으로는 텍스트로 느꼈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간 영화화 된 많은 소설들이 내게 주었던 실망들. 그 경험이 준 깨달음이다. 하지만, 영화 감독들의 고충을 이해한다. 아무래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모두 담기에는 2시간여 남짓의 영화 상영 시간은 너무 짧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텍스트로 이야기 읽는 것을 좋아한다. 오롯이 텍스트로만 문장을 읽어가며, 내 뇌가 상황이나 장면을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구현하는 과정이 묘한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미지나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면, 화면에 표현된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니 상상을 발휘하는데 제한적이 된다. 그래서 텍스트가 더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요새 긴 이야기에 취약하다. 나이가 드니 이제 머리가 받아들이기 힘든가보다. 뇌가 슬슬 좀 더 쉬운 인풋 방식을 찾는 것이겠지.


그런 면에서 이번 작품도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전혀 어려움 없이 술술 읽었다. 나는 그것이 좋은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이야기를 쉽고 이해하기 좋게 표현하고 풀어나가는 힘.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은 흔치않다. 그래서 일타강사들이 돈을 많이 받는 것이다.



이 작품 속, 인물 '간바라 가즈히코'에게서 내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오히려 '가시와기 다쿠야' 쪽이려나. 이렇게 느끼는 건. 내가 요새 회사와 인간관계에서 일정 부분 포기해버린 것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마음먹어야 하는가?'라는 나의 물음. 이 책이 혹시, 그것에 대한 극단적인 답변은 아닐까.(너무 극단적이긴 하지)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경우, 그것이 회사이든 사회이든 대체로 한 인간만의 잘못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인간사는 복잡한 것이다. 누구 잘못인지 찾아내어 벌하는 것은 결국 1차원적인 해결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진실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전체 시스템의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깊은 고민 끝에 자기성찰을 이룬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된다. 책을 다 읽고 그 점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어쩐지 '마녀 사냥'에 혈안이 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 투영된 듯 해서 입맛이 씁쓸했다. 다른 사람 욕할 것 없다. 나 스스로도 마찬가지로 행동하고 있었잖은가. 누군가와 이 책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이래서 독서모임을 하나보다.


현대 사회의 뒷면과 인간 군상의 내면을 표현한 추리물(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추천합니다. 너무 길어 선뜻 손대기 어려운 분이시라면, '화차'부터 시작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니, 아무 책이라도 일단 펼쳐보시죠.

독서는 언제나 옳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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