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연주 감상은 인간이 즐길 수 있는 가장 정적이며 지적인 오락 중 하나다. 그만큼 역사가 깊고 오래되었다. 나는 근본을 좋아하는데, 오케스트라야말로 시각/청각을 자극하는 인류 최초의 오락 근본이 아닐까 싶다. 영화나 유튜브보다 더 오래 사랑받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아래 공연을 보러 왔다.
[출연진]
지휘ㅣ윌슨 응
연주ㅣ한경arte필하모닉
협연ㅣ에스메콰르텟
[프로그램]
쇤베르크 - 현악4중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B♭장조
말러 - 교향곡 제5번 c#단조
예술의 전당은 언제 와도 고즈넉하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지적인 공간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적당히 차려입고 갔다. 재킷, 구두까지는 내가 조금 더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감상복이라고 생각한다. 격식 갖춰 객석에 앉으면, 어쩐지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말러를 듣는다.
구스타프 말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좋아하는 작곡가다. '좋아하는 작곡가'라고 하니 뭔가 거창해 보이는구나. 내가 아는 작곡가가 몇 안된다. 그냥 안다고 하자. 이름 정도만 '아는 작곡가'다. 말러의 음악은 영화에도 많이 등장했다. '타르'를 비롯해서 최근 본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더 유명한 영화로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까지.
아름답고 평온하지만, 어딘지 우울하고, 조금은 불안하고 슬픈. 이름 모를 센치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작곡가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울부짖지 않아서 좋다. 죽음에 대해 집착했던 말러의 생애가 그의 음악에 잘 드러나있다. 말러의 아내 알마는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말러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물론 나는 전문 리스너가 아니라 기껏해야 유튜브의 말러 모음집을 듣는 얕은 수준이니 그저 실없는 소리라고 받아주시길. 음악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 아니던가.
말러는 5번 교향곡이 유명한데, 소개하고 싶다. (이번 연주회에서도 5번이 연주되었다.)
소개하기에 이 CF가 적당하겠다. 말러 5번 중 4악장 아다지에토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광고다. 아다지에토는 혼자 바닷가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며 멍하니 들으면 좋다. 숲보다는 바다가 맞다. 고독을 극단까지 끌어올려 편안히 침잠하고 싶다면 이 음악만 한 것이 없다. G선상의 아리아도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무래도 현악기가 만드는 특유의 낮게 깔리는 분위기 때문인 듯하다. 박찬욱 감독이 이 CF에서 영감을 받아 ‘헤어질 결심’에서도 탕웨이와 말러의 음악을 캐스팅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이런 CF를 과감히 제작한 코오롱스포츠 마케팅팀에게 찬사를 보낸다. (5분 정도 소요되니, 한 번 들어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tNKxAoi-MTc
역시나 나의 관심은 지휘자였다. 그의 열정적인 지휘 속 몸짓과 표정에서 음악에 대한 사랑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지휘봉을 손에 쥐고 화려하고 격렬하게 선율과 하나 되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남자 솔로 피겨스케이팅을 보는 듯했다. 흡사 춤을 추는 듯한 무아지경. 지휘봉을 휘두를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슈트재킷의 붉은 안감조차도 음악의 한 부분 같았다.
누군가는 지휘자를 인간 메트로놈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수많은 연습과 조율 과정에서 지휘자의 리드가 팀을 하나로 만들고,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제품(음악)을 깎고 다듬어 낸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지휘자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감동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기분 좋다. 행복하다.
이렇게 인생은 천천히 흘러가고,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감사합니다.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