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까기 인형'을 보다

루틴의 힘, 우리 가족이 매년 예술의 전당을 찾는 이유

by 이서


우리 집에는 크리스마스 연례행사가 하나 있다. 바로 발레 ‘호두까기 인형’ 관람이다. 다른 날은 안 되며, 크리스마스 이브나 당일에 봐야 한다. 이것은 아내가 정한 우리 집 규칙인데, 다행히 최근 몇 년간은 잘 지켜지고 있다. 2022년부터 시작된 이 전통은 이제 우리 가족에게 한 해의 끝을 알리는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2022년 관람 당시 글) https://brunch.co.kr/@dontgiveup/146


예술의 전당에서는 국립발레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유니버설 발레단이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는 걸로 알고 있다.(아닐 수도 있음.) 발레 팬들 사이에서는 유니버설 발레단의 화려함과 국립발레단의 웅장함을 두고 종종 비교하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이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왜나면 그걸 판단할 만큼의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발레를 잘 모른다. 무대 위에서 펼쳐질 꿈같은 이야기와 음악이 중요할 뿐이다.


문득 강수진 씨가 여전히 국립발레단을 이끌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강수진 씨가 단장이 맞다.) 그녀의 카리스마가 단원들의 몸짓에 어떻게 녹아들었을지 확인하는 것도 늘 이 관람의 숨은 재미다. 무려 강수진 씨가 단장이 아니던가.


2025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찾았다. 나는 예술의 전당에 들어설 때마다, 뭔가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짐을 느낀다. 여기는 도시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이게 바로 건축 설계의 힘이다. 예술의 전당은 '김석철' 교수의 작품인데, 이 분은 김중업과 김수근에게 사사한 유일한 건축가다. (세상엔 천재가 왜 이리 많은 것인가.)


요새는 길거리에서도 캐롤을 듣기 어렵고, 화려한 트리도 보기 힘든 팍팍한 시절이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예외다.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아, 진짜 크리스마스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크리스마스에 설레는 건 중년도 마찬가지다.


높은 층고의 넓은 홀 중앙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위용을 뽐낸다. 그 옆에서는 작은 로비 콘서트가 열려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현악기의 캐롤 선율이 공간을 채운다. 저 밖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들뜬 연말 분위기가 가득하다. 트리 위 반짝이는 오너먼트와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진 이 풍경만으로도 오늘의 티켓은 충분히 값어치를 했다.


여전히 오늘도 사람은 많다. 연말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은 늘 만석을 기록하는 스테디셀러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다들 짜증보다는 설렘이 느껴진다. 표정이 그렇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이 축제를 즐기러 왔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의 캐스팅. 역시나 관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건 주인공 마리나 왕자가 아닌, '호두까기 인형' 역할을 맡은 어린이 배우일 거다. 귀엽고 작은 몸짓으로 무대를 누빌 호두까기 인형의 연기가 기대된다.


다양한 굿즈들도 판매 중이다. 호두까기 인형 모형이 많다. 굳이 사지 않더라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술의 전당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근처에 마땅히 저녁 먹을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밖으로 나가자니 날은 춥고 다시 들어오기도 번거롭다. 그나마 극장 내에서 끼니를 때우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바로 이 카페다. 일종의 타협점인데, 뭐 어쩔 수 없지.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군. 공연 전 간단히 요기하고 커피 한 잔 여유를 즐기려는 이들로 카페는 이미 만석이다. 웅성웅성 말소리와 달그락달그락 접시 소리가 묘한 활기를 만든다. 이것 또한 연말 호두까기 인형 공연의 매력이다.


우리도 샌드위치와 따뜻한 스프, 커피를 주문했다. 사람이 많아서 주문이 밀려있나 보다. 나오는데 한참 걸렸다.


드디어 입장. 우리 가족은 매년 오지만, 1층 앞열의 가장 비싼 티켓을 살 정도의 사치는 부리지 않는다. (라고 쓰고 정신승리라 읽는다. ㅋ 비싸서 그런 거 맞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차이코프스키의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온전히 듣기에는 위쪽 좌석이 더 낫다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물론 아들은 더 가까이서 무용수들의 표정을 보고 싶었겠지만. ㅋㅋ


나는 예술의 전당 특유의, 약간은 올드하지만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이 분위기를 좋아한다. 붉은 벨벳 의자와 나무로 마감된 벽면은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다. 오히려 더욱 격조 있게 느껴진다. 현대적인 세련미보다는 이런 고전적인 우아함이 발레 공연과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오케스트라. 지휘는 제임스 터글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관람했다. 공연은 훌륭했다. 역시 스토리 자체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국립발레단의 무용은 물론이거니와 게다가 연주도 좋았다. 대체 차이코프스키는 어떻게 이런 음악을 작곡했을까? 천재의 영역은 역시 범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건가. 음악은 우리가 많이 들어봤던 멜로디라 친근하다. 아들도 '나 홀로 집에'를 좋아해서 익숙하다고 한다. 그나저나 놀라운 건, 아들이 처음으로 단 한 번도 졸지 않고 끝까지 집중해서 봤다는 사실이다. 장하다 아들 ㅋㅋ


공연의 마지막, 예의 그 '메리 크리스마스' 심볼이 붉은 커튼 위로 비춘다. 나는 국립발레단 공연의 이 시그니처 연출이 참 좋다. 무대가 끝나고 붉은 장막 위에 비춘 눈꽃 무늬와 크리스마스 인사는, 어쩐지 볼 때마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내 여러 글에서 누차 강조했지만, 이런 공연 관람은 인간을 정신적으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된다. 지금 당장은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끝날지 몰라도, 공연 관람의 경험은 영혼과 정신 깊은 곳에 작은 예술의 씨앗을 심는다. 언젠가 그 씨앗은 싹을 틔우고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게다가 매년 반복하는 '루틴'으로서의 관람이라면 그 힘은 배가 된다. 루틴이 주는 삶의 안정감과 힘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1년에 딱 한 번, 호두까기 인형 관람은 앞으로도 계속 잘 지켜나가는 우리 집만의 즐거운 전통이 되었으면 좋겠다. 치열한 티켓팅 전쟁을 뚫고 매번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는 아내가 고맙다.(내년 예매도 잘 부탁드립니다요.) 불평 없이 잘 따라와 주고, 진심으로 즐겨준 아들에게도 고맙다.(계속 같이 다녀줄 거지?ㅋ)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여러분들에게도 잊히지 않는, 의미 있고 따뜻한 한 해가 되었기를 빕니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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