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꽤 깁니다. 사진도 많습니다.
여행의 성패는 전적으로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달린다. 전 직장에서 만난 친구들 R와 K. 나는 목적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이 '대충'의 미학을 이해하는 두 친구들과 부산으로 향했다. '다양한 맛집 탐방'이 주제다.
근무가 끝나자마자 강남에서 수서로, 다시 부산행 KTX로 몸을 실었다. 기차/호텔 예매, 예약부터 맛집 동선까지 친구들이 완벽히 짜놓은 판에 나는 그저 숟가락만 얹었다. 낯선 곳에서 타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따라다니는 것, 이것 또한 여행이 주는 비일상의 묘미다.
두 친구와는 지금껏 몇 차례의 여행을 여기저기 같이 했었는데, 이들이 짜준 코스에는 결코 실패가 없었다. 나는 매번 여행 때마다 이들의 신세를 진다. 23년에 썼던 이 글도, 이 친구들과 다녀온 여행이었다. https://brunch.co.kr/@dontgiveup/169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저 이들을 믿고 맡기고 따른다. (사실, 귀찮아서...는 아니고 ㅋㅋㅋ)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부산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깊었다. 하지만 R의 스케줄에 곧바로 '취침'이란 단어는 없었다. 첫 목적지는 '나주곰탕'.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도 가게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내장국밥'을 주문했는데, 살면서 본 국밥 중 건더기가 가장 실했다. 잡내 없는 내장과 부드러운 고기, 그리고 그걸 탄탄하게 받쳐주는 시원한 국물. 먹다 지쳐 음식을 남겨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시작부터 압도적인 양과 맛이다. 대체 부산은 어떤 곳이란 말인가.
숙소로 바로 들어가긴 아쉽지. 이어지는 코스는 주택가 한복판에 숨어있는 작은 이자카야였다. '이런 곳에 웬 술집이?' 싶은 의구심은 문을 여는 순간 사라졌다. 따뜻하고 아늑한 공기 속에서 혼술을 즐기는 이들 틈에 앉았다. '보리 소츄'(?)라는 건 처음 마셔봤는데, 향이 좋았다. 밤은 깊어 가는데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는 마법.
부산 밤이 생각보다 춥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포장마차에 들렀다. 물떡과 오뎅, 그리고 만두를 간단히 집어 먹었다. 좀 춥긴 했는데, 소주가 들어가니 따뜻해졌다. 부산에 왔으니 소주는 당연히 '대선'이다.
마지막 의식은 편의점이었다. 하이트 맥주와 치토스를 함께 먹으면 극락을 맛볼 수 있다는 R의 기적 같은 논리에 K가 의문을 제기했지만, 가볍게 묵살당했다. 결국 우리는 하이트와 치토스를 손에 들고 숙소로 향했다. (근데 정말 잘 어울리더라. 우리는 두 번째 밤에도 하이트와 치토스를 먹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대화의 주제는 AI의 전망과 개발자의 미래... 였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시시한 농담에 낄낄거리다 잠이 들었다. 원래 인생의 진리는 심오한 토론보다 가벼운 웃음 속에 있잖은가.
아침은 K가 추천한 카페 에어리에서 시작했다.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이 만든 공간답게 정갈했다. K는 '부산 커피는 여기서 마무리해도 좋다'는 단호한 평을 남겼다. 무려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 걸린 공간에서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를 마시니, 잠시나마 고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커피마다 다양한 향과 맛이 있다는 K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지만, 스타벅스의 탄 맛에 이미 익숙해진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것도 연습이 필요할 테다.
남자들끼리의 여행은 늘 이런 식이다. 버스로 이동, 하차, 식당으로 도보 이동, 식사, 다시 버스로 이동. 예전 혹한기 훈련이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멈추지 않는다. 맛집 탐방은 계속된다.
K의 커피에 이어, 점심은 다시 R의 턴. 향촌 돼지국밥에서 '비계국밥'이라는 생소한 메뉴를 마주했다. 비계라니, 너무 느끼하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 그건 기우였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이 흡사 잘 만든 크림스프 같았다. 한국식 고기스프의 정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맛일까. 나는 게눈 감추듯 그릇을 비웠다.
우리의 식후경은 8년 연속 블루리본을 받았다는 노포 빵집 '1974 쉐라미'로 이어졌다. 창가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살 아래, 뜨거운 커피와 빵을 곁들이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인생, 참 별거 없다. 이렇게 친구들과 맛있는 거 먹으며 거리를, 골목을 어슬렁대는 것. 그게 전부 아닐까 한다.
오후의 메인 이벤트는 간짜장 투어였다. '동주각'의 간짜장은 말 그대로 '진검승부'라고 부를 만하다. 소스가 얼마나 진한지 입안이 얼얼할 정도였고, 튀기듯 구운 계란 후라이는 꾸덕한 짜장과 환상의 조화를 이뤘다. 나는 배가 불렀지만 신기하게도 맛있게 다 먹었다.
이어 국제시장 근처를 걷다 호떡 마니아 K의 제안에, 뜨겁고 달콤한 호떡 하나를 각각 해치웠다. 이쯤에서 몇몇 독자들은 '아니 이렇게 많이, 계속 먹기만 한다고?'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나도 살짝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맛있는 게 계속 나오니 먹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맛있으면 된거지. 도장 깨기의 자세도 1g쯤 있었고. 먹으니까 먹어지더라. 인체의 신비란.
목이 말라 근처 바에서 맥주를 간단히 한잔 하며, 깊은 토론을 나눴다. 주제는 '이제 또 뭐 먹지?'
저녁은 산꼭대기 근처의 노드 피자로 결정되었다. 인테리어가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가정집을 개조한 노출 콘크리트와 거대한 샹들리에라는 이질적인 조합이 묘한 매력을 풍겼다.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는 담백했다. 여기 오기 전부터 갈증이 나 제로콜라를 애타게 찾았지만, R은 '배부르면 다음 걸 못 먹는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주먹을 쥐었지만, R은 복싱을 수련하는 몸이다. 승산이 없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R은 결국 노드 피자에서 사이다 주문을 허락해주었다. 참았더니 복이 오는군.
밤은 포장마차 골목에서 무르익었다. 수십 개의 천막이 불을 밝힌 장관 속에서 산낙지와 꼼장어에 대선 소주를 곁들였다. 좁은 포장마차 의자에 앉으니, 부산 사투리가 여기저기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틀째 저녁인데, 이제야 비로소 부산에 왔다는 게 실감됐다.
마지막으로 들른 낡은 LP바에서는 각자 신청한 신청곡을 들으며 부산 밤(사실은 새벽)의 정취를 만끽했다. 가게 안, 50대가 넘어 보이는 남자분 3명이 모여서 즐겁게 음악을 듣고 떠들며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좋아 보였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 이런 아지트가 필요할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어김없이 하이트와 치토스를 샀다. 나는 바로 기절했지만, 젊은(?) 두 친구는 새벽 4시까지 수다를 떨었다고 한다. 그들의 체력이 경이롭다.
느지막이 일어나 찾은 곳은 또 다른 간짜장 노포 옥성반점이다. 소식좌 K는 '어제 먹은 짜장이 아직 위장에 남아 있다'며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R의 미식 로드에는 자비가 없었다. (R의 허락으로 K는 짬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제 방문한 '동주각'의 간짜장이 강렬한 펀치였다면, '옥성반점'은 부드러운 포옹 같았다. 술술 넘어가는 소스의 연한 질감이 일품이었다. 두 곳 중 어디가 낫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다. 자극이 필요할 땐 동주각을, 평온이 필요할 땐 옥성반점을 택하면 된다.
부산역 근처를 한참 어슬렁거리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R은 이번 2박 3일 여행으로 2kg 증량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긴 우리는 그 정도로 많이 먹긴 했다.) K는 며칠 동안 배부른 상태가 계속 유지되었다고, 그래서 샐러드만 먹고있다고 후기를 전했다.
많이 걷고, 많이 먹고, 많이 웃었다. 그거면 된 거다.
여러분도 가끔은 목적 없는 어슬렁거림에 몸을 맡겨보시길.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안녕, 또 올게 부산.
부산 2박 3일 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