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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Nov 10. 2021

다시, 제주에 혼자 왔습니다 2

20211108~20211112

20211109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 밖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하늘이 잿빛이지만 비는 안내린다.

대충 안경을 걸쳐쓰고, 바로 마라도 여객터미널에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오늘 마라도행 배 있을까요?”

“금일 전편 결항입니다.”


모든 일은 '때'라는 것이 있다. 시기가 맞으면 할 수 있고, 못 할 수도 있다. 지난 여행에 이어서 아직까지 나에게 '때'가 오지 않았나보다. 마라도는 오늘도 역시 힘들듯 싶다.

(내일부터는 비 예보가 계속 있던데, 마라도행 확률은 더 낮아지겠지)


괜찮다. 이럴 땐 걷는다.

오늘은 올레 7코스를 걸어보자.


꽤 긴 코스다. 17km. 길면 오래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물을 한 병 챙긴다. 어제 사놓은 쵸코바도 하나 넣고, 경량 패딩도 챙긴다.

뜬금없이 경량 패딩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친구를 좋아한다. 나의 모든 여행에 함께 했다. 심지어 더운 날에도. 경량 패딩을 만나고  삶의 질은  단계 올라갔다고 확신할  있다. 어디든 따뜻해야 하는 나는,  가볍고, 휴대하기 간편한 친구를 만나고 언제 어디서든 체온을 유지할  있다.  기회를 빌어 경량패딩 개발자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일찍 집을 나선다. 바람이 세게 몰아친다. 비만 안 내릴 뿐이지, 태풍이 근처 가까이 있는 것 같다.

뭐, 그래도 비만 안내리면 된다. 걷는데 지장 없다.

코스 시작점에 아래와 같은 안내판이 있다. 어제는 좌측 6코스 쪽으로 출발했고, 오늘은 오른쪽 7코스 쪽으로 출발이다. 오늘은 파란 리본과 안내표식을 따라가면 된다. (역방향은 주황색)


아래 사진처럼 매달려 있는 리본을 따라가면 된다. 정방향은 파란색. 역방향은 주황색.

(함정 리본을 조심하자)

저 멀리 천지연 폭포가 보인다. 저긴 내일쯤 가보자.


걷다보니 어김없이 오름이 등장했다. KBS송전탑인가 하는 높은 곳으로 이어진다. 울퉁불퉁 산길이 아니라서 만만하게 봤는데, 은근히 경사가 있다. 헉헉대며 올라갔다. 하지만 어제처럼 해가 저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 느긋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 역시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 한다. 쫓기듯 움직이면 실수한다.

오름에서 바라본 전망, 섬의 하늘은 육지의 그것과는 다르다.


오름을 내려와 내가 좋아하는 바닷가 코스에 접어든다. 바람이 세고 하늘이 어둡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날씨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인적이 전혀 없는 바닷길


딱히 바다 공포증이 있는 건 아닌데, 아래 사진과 같은 장면을 가까이서 보면 무섭다. 저 아래 하얀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모습을 멍하니 한참 보고 있노라면 검은 물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조금 더 절벽으로 가까이 가서 찍어보고 싶었지만, 추락하고 싶지 않아 여기에 만족했다.

바다는 검고 어둡다


열심히 걷다가 만난 '외돌개'

어떻게 저렇게 혼자만 깎여나가지 않고 우뚝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안내판에 써 있기론, 약한 부분은 다 침식되고, 저 하얀돌. 그러니까 강한 부분만 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영원히 남아있을 외돌개는 과연 행복할까.

잘 보면 외돌개도 헤어가 있다. 외돌개도 머리가 있는데, 나도 관리를 열심히 잘 해야겠다.


예전에 포르투갈 '파티마 예언 발현지'에 갔을 때도, 이런 구름이 있었다. 저런 구름이 있으면, 그 어떤 신화적 이야기도 받아들일 것 같다. (없던 전설도 생길 판) (파티마 방문기)

공포스러운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이성적 판단력이 흐려진다. 우리는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

구름을 뚫고 뭔가 내려오는 듯 하다


걷다가 만난 돌담. 자세히 보면 촘촘하게 잘도 쌓아놨다. 어쩜 저렇게 알맞은 돌을 딱 제자리에 가져다 놨을까. 큰돌, 작은돌, 모두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다.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장면을 보면 매우매우 만족스럽다. 어떻게 비바람을 견디고 버티는 걸까. 라고 신기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다가갔는데, 콘크리트를 위에 발라놨더라. (콘크리트 폄하 아닙니다. 로마 콜로세움이 여전히 그렇게 서 있는 것도 콘크리트 덕분이니까. 콘크리트 만세)

불규칙한 것들이 모여, 정돈되고 안정감 있는 모습을 갖추었다.


감귤 나무가 어디에나 많더라. 부디 농부 분들이 흘린 땀만큼 값진 수익을 제대로 얻으시길 바랍니다. 제주 감귤을 많이 사먹읍시다.

메타버스 안 어디인 듯


오늘 걸으면서 마스크를 안 쓴 분들을 제법 만났다. 이 글에 너무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특정한 나이대의 분들이 그런 모습을 많이 보였다. 그 분들은 여럿이 여행을 오셨는데, 절반 이상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셨다.(심지어 올레길에서 담배를 태우는 분들도 여럿이었다.) 내가 예민한건지, 제주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건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물론 나도 사람이 없는 구간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시원하게 호흡하며 걸었다. 하지만 저 앞에 사람이 보이면 반드시 마스크를 올려썼다. 반대편에서 오시는 분들도 마찬가지로 마스크를 올려써 주셨다. 물론 2m이상 떨어진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반드시 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건, 서로 예의를 갖추는거다. 예의.

아랑곳하지않고 당당하게 노마스크/턱마스크로 (뭔가 큰 소리로 떠들며)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시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위드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스크는 나같은 겁쟁이들만 사용하는 아이템으로 전락하는 걸까.


햇살이 나무 사이로 쏟아진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스며든다.
하늘이 예뻐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은 이렇게 온전한 하늘을 보기 힘들다.


강정 마을에서 아래 사진을 찍은건, 어디서 봤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하와이였다. 하와이에 가서도 많이 걸었는데, 그 때 느꼈던 길과 하늘, 바다의 분위기가 매우 비슷했던 기억이다.

하와이 걷기도 참 좋았다는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기회가 되면(기회가 또 올까) 다시 걸어보고 싶다.

이런 길은 너무 좋다. 그냥 걸으면 된다. 쭉.
또 어느새 구름이 뒤덮고 바람이 몰아친다. 빗방울도 떨어지고. 이렇게 다이나믹한 날씨가 제주의 매력이다.
무서운 바람 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 하늘이 파란건 정말 신기하다. 왜 빨간색이나, 노란색이 아닐까. 지구인들은 정말 운이 좋다.


이 다음은 계속 위 사진 같은 길이었다.

내륙 마을 길을 계속 걸어서 딱히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나는 바닷가 길을 좋아하나보다)

7코스 종착지에 도착했다. 다섯 시간 정도 걸었다.바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이번 코스를 걸으면서 생각이 조금 더 확실해졌다.

올레길이 오래되다보니 길 정비가 안되어 있고, 표식이 누락된 곳이 제법 있다. 표식도 너무 다양해서 '화살표' , '개 모양 구조물' , '리본'(함정 리본까지 잘 구별해야 한다) 등등을 잘 따라가야 한다. 잠깐 정신 놓고 걷다보면 헤맬수 밖에 없다. 위험한데다가 표식이 부족하니 반드시 휴대폰 GPS 기능을 사용해야 한다. (요새 네이버 지도 같은 것 켜놓으면 꽤 정확하게 안내/추적해준다.)

양갈래길에 표식이 없으면 대체 어쩌란 말인지 (심지어 갈래길에서 양쪽으로 표시가 되어있는 곳도 있었다) 어둑어둑한 늦은 저녁에 엉뚱한 표식을 따라가다가 음산하고 외진곳에 접어들어 길을 잃으면 큰 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해서 다시 올레시장으로 갔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먹어서, 늦은 점심이라도 먹어야 했다. 어제 먹었던 그 국수집으로 다시 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맛있었나보다. 오늘은 국밥을 시켜봤다. 어제 그 설렁탕 국물에 밥이 말아져 나왔다. 역시 맛있었다.(오래 걸어서 그런걸지도) 마지막 국물까지 모두 마시고 일어났다. (내일 또 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런걸 보면 나는 루틴한 것을 좋아하는 게 정말 확실하다. 이런저런 사소한 고민은 최대한 패턴화해서 루틴하게 의사결정 하는 것을 즐긴다.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원칙을 정해 행동하고 싶어진다. 그럼 뇌가 들이는 수고를 줄일 수 있다. 다른 더 중요한 고민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리해놓은 다음, 그 기준대로 움직이면 편하다. (국밥 한 그릇 먹고 인생의 원칙까지 얘기하는 걸 보면 꼰대인 것도 확실하네)


방에 와서 씻고 잠깐 잠들었다가 노트북을 챙겨들고 1층 카페로 왔다.

지금 이 글은 거기서 쓰고 있다. (이 카페는 내일 다시 소개하기로)



저녁은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포장해왔다. 상호는 '제일반점'.

비도 오고, 가까워서 그냥 선택한 집인데 웬걸?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재방문 의사 있음. 요새 볶음밥에 짬뽕 국물을 안주고 계란탕을 주는 중국집들이 많은데, 여기는 짬뽕 국물을 주셔서 좋았다. 게눈 감추듯 흡입했다.


제주는 내리는 비가 멈추지 않는다. 일기예보에도 계속 비가 온다고 한다.

제주가 물이 맑고 많다더니, 비가 많이 내려서인가보다.

먹은 용기를 대충 정리하고, 잠들었다.


제주 2일차.



1일차 : https://brunch.co.kr/@dontgiveu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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