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클래식을 함께 듣던 어느 가을밤을 기억하는지
어느 날 문득 미술관이 좋아졌습니다. 그저 그 공간에 혼자 놓여있는 게 좋아서 내 앞에 걸린 그림이 궁금해졌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졌습니다. 오래전 그들이 남겨둔 각각의 구덩이 앞에서 우리가 가진 결핍의 모양과 크기를 만져보며 이십 대 중반이 지나갔어요.
절대 되지 않겠다던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바쁘게 사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면, 소중한 것들이 하나 둘 성가시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을 찾는 빈도가 줄었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스스로에게도 둔감해져 갔어요. 애써 외면하며 현실을 살아내는 사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고, 저는 홀로 사그라들어갔죠.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에어컨을 틀고 한여름의 분홍빛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변해가는 시간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죠.
이렇게는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 없을 것이 불 보듯 뻔했어요. 아무런 호기심도, 의욕도, 설렘도, 사랑도, 생기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죠. 다시 어딘가에 마음을 쏟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저는 음악을 잘 몰라요.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도, 장르도 없어요. 뭐가 느껴질 만큼 잘 들리지도 않고요. 하지만, 미술과 음악이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건지. 문득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소련 정부의 압박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그의 심장박동이 들리는 것 같다던 오랜 친구의 말이 생각나요.
마침 미국에 사는 그 친구가 한국에 돌아와 잠깐 만났어요. 마치 어제까지 이야기를 나눈 사인 냥 2년 전 LA 게티 미술관에서 하던 이야기가 올림픽공원에서 이어졌어요. 음악과 미술의 역사가 맞닿는 지점과 우리가 초등학생 때부터 쌓아온 시간을 이야기하다 보니 썩 행복하더라고요.
예전에 봤던 뮤지컬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안나 카레니나를 죽음으로 내던진 아름다운 소프라노의 목소리. 쇼스타코비치를 주인공으로 그린 소설 <시대의 소음>과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보며 스터디 주제를 서양음악사로 정했죠.
스터디 하루 전. 회사에 남아 이 방대한 서양음악사를 어디까지 어떻게 전달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전 스터디에서 한번 다루었던 미술사와 연결시켜 풀어보기로 했거든요. 그 시대의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듣는 방식으로요. 친구와 자주 나누던 대화 주제이기도 해서 양이 방대해졌는데, 이걸 하루 만에 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이었죠.
그러다 우연히 예술에는 전혀 관심 없는 개발자 동료와 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금요일 밤, 회사에는 아마 우리 둘 뿐이었던 것 같아요. 나의 이십 대 시옷 시절을 함께 한 그림들을 띄워두고, 그림을 닮은 음악을 함께 들었어요.
이 음악을 들으면 뭐가 느껴지냐는 질문에 동료는 예상외로 진지한 표정이 되더라고요. 스터디 예행연습이긴 했지만, 야심한 시간에 명화와 클래식이라니. 솔직해져 보자면, 제게 더 이상 음악사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저 지금 내 앞에 앉은 잘 모르는 남자가 살아온 역사와 이야기가 궁금해졌죠.
시옷이 비읍이 되면 후반이라던데. 이제 더 이상 순수한 호기심과 설렘, 사랑에 빠지는 일, 그런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자꾸만 그 사람 생각이 나요. 이십대 끄트머리의 어느 금요일 밤을 저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하겠죠. 함께 들었던 드뷔시의 <달빛> 빼고 다른 음악은 생각도 잘 나지 않는데 말이에요.
2020년 11월 4일에 쓰고, 2022년 9월 18일에 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