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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Sep 10. 2022

아, 명절이다

여기저기 깨진 가족과 내 모습이 새삼 따가운 계절

명절에 그저 마음 편한 집이 얼마나 될까요. 흔치 않다고 해도 내 가족의 일이 되면 역시나 쉽지 않습니다. 친가와 외가. 분위기는 정반대일지라도 한없이 반갑고 기다려지는 만남이지만은 않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데다 막내아들의 딸에게 줄 것은 더더욱 없으면서 영 보수적이고 따질 건 다 따지는 친가에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말마다 일가친척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여자 아이가 목소리가 크다. 어른들 말씀하시는 데 끼어든다."라고 혼나기 일쑤였어요. 가끔 할머니한테 "생일은 느려도 동갑내기 남자 사촌에게 오빠라고 불러야지."라는 말도 안 되는 무시를 당하기도 했고요.


우리 집도 그렇게 여의치 않은데 "유산은 당연히 장손이 받아야지. 아직 젊고 애들도 어린 막내네가 고생해야지."라는 말 때문에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서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치마가 너무 짧다", "여자는 너무 늦기 전에 빨리 적당한 사람 만나 시집가야지." 등등 애정과 관심을 빙자한 폭력에 노출되곤 합니다.


덕분에 겉으로는 적당히 예의 바른 사람으로 자랐고, 학교부터 회사까지 크고 작은 사회에서 만난 웬만한 폭력과 꼰대력에는 별말 없이 삼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집에서 이미 사회의 냉정함, 여자의 억울함, 시댁의 매운맛을 골고루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친가는 이제 제게 타격감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속으로 숨 한번 쉬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외가와의 관계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부족하지만,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저를 맡아 키워주셨던 할머니와 삼촌들. 어릴 땐 엄마 아빠보다도 할머니와 삼촌들을 더 그리워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와 삼촌들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게다가 집안이 어려워지자 우리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내주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것도 모두 잘난 친가가 아니라 외가 식구들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며 가며 챙겨준 작은 삼촌과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편안하고 따뜻했던 이곳에도 복병은 있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일찍 사별하고 악착같이 삼 남매를 키워낸 외할머니. 역시나 큰아들 사랑은 그 시절 모든 어머니처럼 유별납니다. 엄마와 작은 삼촌 모두 여전히 아쉬움을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고요. 큰삼촌은 할머니의 사랑 덕분인 지 아주 높은 자존감으로 평생을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사업 한번, 결혼 한번 시원하게 실패하고도 열심히 술 마시면서 동시에 교회도 다니며 자신에게 심취해서 살더니, 나이 육십에 저와 동갑인 베트남 여자를 만나 기어코 손자 같은 아들을 봤습니다.


행복하게 잘이라도 살면 모를까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신부는 매일 같이 이혼하겠다고 난리입니다. 남은 식구들은 죄 없는 아이가 걱정되어 어린이집으로, 삼촌 가족이 한 푼도 안 내고 살고 있는 할머니 소유의 집으로 쫓아가기 바쁩니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면 너도 빨리 결혼해서 나랑 같이 애 키우자고 해맑게 말하는 사람이 우리 큰삼촌입니다. 자기 대신 평생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작은 삼촌에게는 막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삼촌은 모르겠다 쳐도, 정말 속상한 건 할머니입니다. 젊을 때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는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귀는 거의 들리지 않고, 앞니까지 다 상했으면서 치료도 받지 않고 여전히 악착같이 돈을 모으십니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는데, 본인이 지켜온 삶의 방식에 자식들이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영화 <고령화 가족>을 보면 자꾸만 우리 식구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한동안은 명절이면 약속을 잡거나 해외여행을 떠나며 그저 거리를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에 자기중심적으로 자라 버린 큰아들과 결국 그로 인해 상처받는 다른 형제들. 여자라서, 며느리라서, 딸이라서 겪는 언어적, 비언어적 폭력. 돈을 매개로 시작되는 매번 같은 이야기.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이 가해지는 상처를 견디고 싶지 않았습니다.


코로나가 끝을 보이고, 3년 만에 예전처럼 명절을 보냈습니다. 도망칠 타이밍을 놓친 건지, 과거를 잊은 건지, 제가 더 이상 친척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해진 건지. 오랜만에 친가와 외가 식구를 모두 만났습니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대부분의 것은 그대로입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이 풍경에 속해있는 것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드네요. 마음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저 모든 부서진 명절이 큰 소란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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