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 탈도 말도 많지만 집에는 가야죠
저녁 여섯 시 이십팔 분. 노트북 뚜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지만, 후. 오늘 하지 않는다고 큰일이라도 나겠습니까. 직장생활 5년 동안 배운 거 하나는 모든 일을 그렇게 다 제대로 빨리 해버릴 필요는 없다는 거.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기억력이 적당히 나빠야 행복하다는 거.
도보로 8분 거리를 4분 만에 달려 회사 근처의 한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무려 일 년 반만이네요. 늘 여유 넘치고, 사람 좋지만 자기만의 선이 확실한 사람. 여유는 잔고에서 오고, 상냥함은 탄수화물에서 온다는 말을 벌써 10년째 몸소 보여주고 있는 사람. 다음 생이 있어서 꼭 태어나야 한다면, 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참 친애하고 존경하는 선배를 만났습니다.
오늘도 한우를 사줄 심보인가 봅니다. 오늘만은 선배가 계산하지 못하게 일부러 가에 앉았습니다. 변변치 않은 후배지만 그래도 이제 어쩌다 소고기 대접할 만큼은 버는데, 너 돈 잘 버냐면서 역정을 내십니다. 다음번에 부담스러워서 만나기 싫어진다는 핑계로 N빵을 강요합니다. 참내!
카카오페이로 쿨하게 송금을 날리고, 택시를 잡아 유유히 사라지는 새럼. 진짜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한 세 시간 그리 길지 않은 술자리에 하루치 피로가 싹 풀립니다. 오늘 점심에 분명 평일에 술 마신다는 동료에게 체력도 좋다며 한 소리했는데. 퇴근 후 알딸딸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글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아침 아홉 시 삼십 분.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부고 문자를 받았습니다. 10년째, 마음 한편에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선배의 부친상 소식입니다. 발인이 바로 내일인데, 장례식장은 안동. 마음 같아서는 아버님 보내드리는 길 곁을 지켜드리고 싶지만, 여러 가지로 쉽지가 않습니다.
고민 끝에 부의를 보내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사이가 썩 좋지 못한 아버지를 먼 곳에서 보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나름대로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데 젊음의 한 페이지를 다 써버렸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도저히 위로할 용기가 나지 않아 금방 끊어버렸습니다. 대학생 때였다면 대신 엉엉 울어주었을 텐데, 생략된 사연을 감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척 묻지 않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요즘 참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았는데, 제발 감당할만한 수준의 상처만 남기를 바랄 뿐입니다.
택시에서 내려 다시 현관문 앞. 여전히 쌀쌀하네요. 선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게 바로 오늘 아침이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생전에 뵌 적도 없으면서 왜 자꾸 마음에 밟히는지. 이러다 술이 다 깨버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