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치를 볼 때
어느 날 남자 친구가 말했다. "그럼 네가 또 화낼까 봐 그랬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하지만 미처 쿵- 소리가 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뾰족한 말. "또? 내가 언제 또 화를 냈다고 그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고 오빠는 나 화나지 않게 하려고 만나? 내가 오빠 상사야?"
'아... 이렇게까지 말할게 아닌데.' 하지만 한번 터진 방언이 쉽사리 멈출 리 없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전형적인 싸움으로 번지던 찰나에 그가 말했다.
넌 불안하면 화를 내잖아.
나까지 널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미울 법도 한데 그는 말없이 내게로 온다. 그리고 나를 꼭 안는다. 괜한 자존심에 몇 번 뿌리치는 체를 하다가 결국 그 따뜻한 품에 안겨 엉엉 울고야 만다. 부모님도, 나도 몰라주던 내 마음을 나보다도 더 잘 알아주던 사람이었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내가 자꾸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할퀴고 끌어내리는 건 무섭고 불안해서라는 걸.
다시 사랑에 빠졌다. 머리보다 내 눈이, 마음이 더 빠르게 내달렸다. 찰나의 눈웃음에, 지나가면서 건네는 한 마디에, 가끔 먹는 밥 한 끼에. 우리 사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전 남자 친구에게 받은 사랑을 온전히 돌려주고 싶은 사람을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겨우 두어 차례 같은 문제로 싸운 뒤 그가 묻는다.
나를 만나서 행복해?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은 거 아니야?
뭘 어떻게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선 기분이라고 했다. 내 말 한마디, 숨소리마다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버겁다고 했다. 숨이 턱 막힌다.
이번엔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난 분명 매 순간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오답노트를 품에 안고 너를 대했는데. 내가 그냥 사랑을 질리게 하는 사람인 걸까. 넌 고작 몇 마디였겠지만, 내겐 지나간 기억이 함께 몰려온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내내 설레다 지치다 원망하다 다시 기다리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간간히 좋았던 날들. 대체로 힘들었던 밤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힘들게 한 날들.
이전 사랑에서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배웠다면, 너를 만나고는 불안한 시간을 온전히 감당하는 법을 배웠다. 내 불안이 네게 옮겨가지 않도록 책을 보고, 청소를 하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그리고 네가 몰려오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긋 웃어 보이고, 실제로 조금은 괜찮아지고. 너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혼자서 일어서는 법을 배웠는데, 너한테는 그 마저도 무거웠던 걸까.
어떤 관계는 끊어내기는 힘들지만, 막상 끊어내고 나면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오빠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었을까, 나에게 이 관계가 그렇게 남을까. 너에게도 혹시 내가 그럴까.
2019년 처음 쓰고, 2021년에 덮어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