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의 무게
그냥 어려서부터 그랬다. 집이 어려워서도,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도 아니다. 타고난 기질이었다. 대단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그저 나 하나는 스스로 건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큰 성공은 됐고, 그저 내 몸 하나 책임지고 사회에 피해 안 끼치고 타인에게 침해당하지 않는 개체가 되고 싶었다.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가장 큰 성공이긴 한데, 나를 포함해 아무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하고, 그냥 내가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게 가만히 두었으면 했다. 좀 불성실하고 삐딱한 반골로 살아도 괜찮았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쉽고 접근성 높은 방법이 십 대 때는 공부를 주야장천 잘하는 거였고, 이십 대에는 빠르게 정기적인 소득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누구도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을 테니까.
진즉에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자리에 앉아 정해진 시간을 채우는 방식이 내게 맞지 않다는 것을. 바짝 스파크를 튀며 몰입할 자신은 있지만,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스파크가 내가 성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큰 크기였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딱 적당한 회사에서 적당히 잘할 만큼 작은 재능이었다. 나 스스로 지속 가능한 생산수단이 될 만큼도, 내게 생산수단을 갖게 해 줄 만큼도 아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꾸역꾸역 직장인이라는 옷을 찾아 입었다. 앞에서 말했듯 남의 간섭 대로 살기 싫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스스로 먹고사는 능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인지하면 해결된다는데. 분명 맞지 않을 것을 알고 시작했는데도 와우 더럽게 힘들다. 끝이 정해져 있는 자발적 반강제적 외거 노비 생활인 데 왜 자꾸 몰입하게 되는지. 왜 자꾸 허탈한 지. 조기 교육이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일단 하기로 한 것은 언젠가 나가떨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법 밖에 배우지 못한 탓이다. 결과 없는 과정은 돌아볼 수 없는 상처가 되는 사회라는 것을 익힌 탓이다.
이제 진짜 한 대만 더 맞으면 K.O 패다. 성실한 (척 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수명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배터리가 깜빡거린다. 매일 아침 출근 전 오늘도 힘을 빼고 저전력 모드로 살아 보자고 주문을 건다. 회사 밖에서 빨리 생산 수단을 만들자고. 하지만 기억력이 원체 나쁜 탓일까. 사회가 이미 나 같은 애들을 너무 많이 봐서 마치 부동산 법처럼 점점 더 교묘하고 촘촘해지기 때문일까. 수명을 까먹는 것을 알면서 왜 때문인지 오늘도 또 열심히 하고야 만다. 더 이상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녹초가 돼서야 퇴근이다. 투 트랙은커녕 원트랙도 안되는데, 파이프라인은 사치다.
진짜 그만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남들 앞에 숨기기는커녕 스스로를 설득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선명한 신호를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다. 강제 종료되기 전에 쉬어야겠다고, 충전이 필요하다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버티냐고 나를 향해 악을 써본다. 아마 영원히 준비되지 않을 거라고. 일단 관두자고. 설마 굶어 죽겠냐고. 눈도 못 뜨겠는데,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런데 오늘은 월급날이다. 저번 달 카드값을 내고, 이자에 원금을 치르니 잔고가 20만 원이다. 남은 잔고를 보며 다시 한번 먹고사는 일의 무게를 깨닫는다. 월급이 적은 것도 아닌데. 물론 다음 달엔 라섹 수술도 하지 않을 거고, 신용카드도 잘랐으니 좀 더 가볍겠지만 올해도 돈 들어갈 일이 줄줄이 사탕이다.
정말 이 돈 없이 살 준비가 되었나. 냉정한 자아가 다시 고개를 젓는다. 사회에만 반골인 게 아니라 나에게도 시도 때도 없이 태클이다. 한 번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법이 없다. 죽겠다는 나를 외면한다. 퇴직금을 까먹으면 육 개월은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을 텐데. 그건 쓰지 말고 모아야 하는 돈이라고 배웠다. 조금 쉬었다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냐고 말해봐도 소용없다. 경력 단절 같은 소리가 이제 와서 나에게 통할 리 없다.
2018년,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꿈꿨다. 꼬박 4년이 흘렀는데 나는 여전히 월급 없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을 선택했는데, 자꾸만 익숙해졌다가 잊어버렸다가 다시 익숙했다가 잊는다. 어떻게 하면 당장 그만두지는 못해도 물질적으로, 심적으로 직장 의존도를 낮출 수 있을까. 온전한 나의 생산 수단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평생의 꿈인 현실을 직시하되 나도 타인도 속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몸과 마음과 너무 후져지기 전에 멈추고 시작할 수 있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살이 있는 삶은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까. 과연 언젠가는 몸도 마음도 마비되지 않고 흐르는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직은 사치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