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일상
2주 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이 끝났다. 이제 막 시차 적응도 끝내고 도통 없던 입맛도 돌아왔는데 돌아가야 한다니. 분명 며칠 전까지 '내가 뭐한다고 여기까지 왔냐며'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가기 싫다. 마이너스를 향하는 통장 잔고와 벌기도 전에 쓴 신용카드 내역을 돌아보면 분명 지금이 현실로 돌아가야 할 타이밍이다. 하지만, 이제야 노는데 익숙해졌는데! 이제야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다시 고이 마음속에 접어두고 출근하는 직장인 모드로 돌아가야 한다니.
인천행 비행기를 타자마자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난무한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한국말이 어찌나 귀에 쏙쏙 꽂히는지. 한국 아저씨들 불평불만은 정말 토씨 하나 안 빠지고 잘 들린다. 내가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않는 게 늘 아쉬웠는데, 덕분에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문맥 사이에서 고요하게 존재할 수 있었구나. 듣고 싶은 말 혹은 꼭 필요한 말만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자유였나.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 영어로만 제공되는 기내 콘텐츠를 귀에 꽂는다. 40대 후반(한국 나이로는 50대겠지)이 된 <Sex and the City>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은 <And Just Like That...> 시리즈. 언젠가 기사로 출연 배우 간의 불화설(?) 왕따설(?)을 들은 터라 100프로 몰입은 안 되었지만, 다시 한번 내 앞에 남은 인생이 얼마나 길고도 짧은지 생각했다. 과연 반쯤 알아들은 드라마를 본 감상인지, 이번 여행에 대한 소회인지 모를 일이지만.
더 놀라운 건 10개 에피소드를 내리 다 봤는데 아직도 북미 상공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 서부 시간으로 아침에 비행기를 탔더니, 잠도 전혀 오지 않는다. 큰일이다. 좌석 앞 화면에는 아직도 비행시간이 8시간도 넘게 남았다고 뜬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이곳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뭘 해야 하지.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반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 그리고 그걸 어찌할 줄 모르는 나. 조금 떨어져서 보니 꽤 익숙한 광경이다.
이번에 정말 계획 없이 놀면서 '아 생각보다 30분, 1시간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시간이 없어 죽겠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꽤 시간이 많구나. (한시적 백수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마음먹으면 비행기 타고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마실을 다녀올 수도 있고, LA는 기차만 타도 된다. 시간이 가장 귀하다고 하지만 내 생활 패턴을 봤을 때, 시간을 쓰고 싶으면 또 아예 못 내서 쓸 그런 사람은 아닐 수 있겠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그냥 지금 현생이 바쁘니까, 그거까지 또 어떻게 해.' 하던 것들도 생각보다 많지 않은 시간을 들이고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거. 하루에 깨어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길다는 거. 그냥 할까 말까 할 때 하면, 의외로 다 하고 시간이 남는 경험도 할 수 있단 거. 그냥 그 시간을 잘할 자신이 없으니 "아 몰랑 안 해."하고 침대에 누워버려 왔다는 거.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를 막아온 기분이랄까.
회사가 바쁘니까 평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일정은 일절 잡지 않고, 본업이 이렇게 지치는 데 사이드 프로젝트까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몇 번 깔짝 되다 나가떨어지고. 나하나도 건사를 못하는데, 가족, 친구, 직장 동료까지 챙길 수 있을 리가? 지레 포기하고. 이런 게 반복되면서 '나는 원래 한 번에 하나밖에 못해. 많은 거에 신경 쓸 수 없게 프로그래밍된 인간이야. 누구 챙기고 이런 거 너무 어려워.'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고, 또 위의 패턴이 반복되고 강화되고. 이런 패턴도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고. 그리고 계획에 없었는데 자꾸 고개를 비집는 빈 시간들을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미국까지 와서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한국말로 뭐라도 쓰면서 깨달았다. 깨달았다고 하니 왜인지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처럼 거창해 보이는구먼. 그저 그 공허하지만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온전히 경험했다. 주변에 그 무엇도 내게 자극이 되지 않을 때, 낯선 풍경조차 마음에 닿지 않을 때. 시간이 정말 덧없이 흐를 때 나는 글을 썼다.
그저 잠이 오지 않을 때,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을 때, 마음이 요동칠 때 친구가 마련해준 에어 매트리스 위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말을 계속 썼다. 다운 타운을 걷다 갑자기 다리가 아파 들어간 스타벅스에서도, 햇빛을 피하기 위해 잠시 앉은 야외 파라솔 아래에서도,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기차 안에서 그냥 컴퓨터를 열었다. 그리고 나선 이십 분이고,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당연히 열어 놓고 멍만 때리다 안 써지는 글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유튜브나 인스타만 보다 끝나기도 한다. 근데 뭐 그럼 그럴 수도 있지. 나 지금 휴가 중이잖아. 일하는 시간도 아닌데 뭐. 그리고 쓰고 나면 그냥 그걸로 끝이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그토록 주창했지만 자주 실패했던 "힘 빼고 살자."를 조금은 살고 간다. 편한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고, 햇살을 맞으며 걷다가 사진을 찍거나 글을 끄적이고, 한 끼 정도는 건너뛰고, 대신 맛있는 커피와 음악을 듣고. 가끔 꽃을 사고, 너무 피곤하면 낮잠도 자고. 한 번쯤은 푹신한 호텔 침구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파고들고. 따뜻한 미온수에서 아침 수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목적 없는 여행을 위해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가끔 요가를 하고. 사람도 만나고.
아직도 인천까지 네 시간이나 남았다. 아까보다는 숨 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땅에 내려서도 습관적으로 시간을 계속 보게 되겠지. 새 회사에 출근하면 그 압박이 생각보다 커서 당황할지도 모른다. 숨이 턱 막힐지도 모른다. 오래된 내 습관이 나를 현실에, 하루에, 당장 이 순간에 묻어버리기도 하겠지. 너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조금 겁이 난다. 새로운 회사에 간다는 사실보다도 그에 대응하는 나의 익숙한 패턴이 무섭다. 좋은 점도 있는데, 나를 보호하겠다고 그냥 막 후려쳐서 판단해버리지는 않을까. 처음부터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 괜히 먼저 굳어 지내지는 않을까. 사실 해낼 수 있는데,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져서 압박이 너무 크게 다가와서 도망치지는 않을까.
그렇지만, 어쨌든 시간은 가고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콧구멍 쑤시고 며칠 비몽사몽 하다 보니 내일부터 아니 벌써 오늘이네. 오늘부터 새로운 곳으로 출근한다. 너무 기대하지 말고 천천히, 조금은 힘 빼고 여행 온 사람처럼 가보자. 시간이 너무 없거나 너무 많다고 놀라지 말고. 그냥 지금은 그렇구나 하면서. 그냥 그 시간에 쓸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걸 살자. 그럼 또 일주일 내내 나를 괴롭혔던 시차처럼 어느새 몇 편의 글만 흔적으로 남기고 적응하겠지. 와. 근데 첫출근 앞두고 시차 적응 실패해서 새벽 3시에 이 글을 쓰는 나는 일단 내일 가서 안 졸 수 있을까. 일단 오늘은 그만 쓰고 눈 앞의 생존부터 생각하고 좀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