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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May 01. 2022

고장 난 계산기를 가지고 살기

마음속으로 지레짐작하는 삶은 정말로 피곤하지만

어쩌면,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랬습니다

'저 사람은 왜 나한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왜 저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걸까. 무슨 실수라도 했나.' 숨 쉬는 순간마다 참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많이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사랑에 빠졌던 시절에, 온전히 내게 집중해주는 사람이 있던 때에 잠시 맛 본 자유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나 봅니다.


여전히 타인이 하지도 않은 말을 마음속으로 상상하고, 의식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한 해 한 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늘어날 뿐. 애초에 외부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연습을 할 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경 쓰며 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예민해서 둔감한 척합니다

꽤 오랜만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다시없을 것 같은 설렘에 나도 모르게 자체 보정 작업을 했습니다. 실제보다 덜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인 척했어요. 내가 얼마나 쉽게 걱정하고 우울해지는지, 이상과 현실 감각에서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늘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대했습니다. 그 마음을 꼭 얻고 싶었나 봐요.


시간이 꽤 더디게 흘렀지만, 결국 그 마음을 얻었습니다. 어렵게 이름 붙인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달라질 거라 기대했는데, 여전히 혼자 애태우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막상 저는 거짓말로 점철된 자기소개서를 쓰고, 내가 아닌 가상의 누군가를 연기해서 합격한 대기업에 출근한 신입 사원 마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너무 쉽게 내게 질릴까 봐 서운한 걸 서운하다고 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는 척했어요. 지금까지 만났던 누구보다 내가 편하다고 말하는 그 사람 앞에서 또 한 번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지만 속일 수 없는 순간이 다시 찾아오기도 하죠

100일, 200일, 300일.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렀습니다. 일 년 가까운 시간이 진눈깨비처럼 땅에 닿는 순간 흩날립니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왜인지 점점 멀어져 가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함께 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설렘으로 애써 서운함을 달랬는데, 이제는 굳어가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원래도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유하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듭니다. 애매한 익숙함과 어색한 거리감이 주로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길고 진했던 이전 연애가 끝나고 분명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내가 받은  거대하고 온전한 사랑의 경험을 미래의  사람에게 주겠다고. 이상한 셈법은 제쳐두고  존재를 사랑해보자고.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려다 보니, 이번에는 내가 내가 아닌  같습니다. 싫은  싫다고 하지 않고, 참을  없는  참다 보니 충전되어있던 사랑 에너지도 금세 바닥을 보입니다. 자꾸만  관계가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마음이 행복하지가 않아요.  사람을  이해해보려다 내가 나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고장 난 계산기를 가지고 살아가기

그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가 경험한 놀라운 사랑의 힘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러면 내게도 그런 사랑을 다시 받을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착각했나 봐요. 삶은 그렇지가 않은데. 내가 준만큼 받을 수 있는 것도, 내가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 노력하고 사랑하면, 상대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니. 또 얼마나 순진했던가요.


이제 더 이상 순수하게 타인과 관계 맺기가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사회에서 만난 사이는 물론이고 아무리 가까운 친구도 가족도 더 이상 서로에게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이해의 폭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조용히, 운이 좋으면 시끄럽게 정리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사라진 인연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렇지만 세상에 단 한 사람과는 그냥 서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공유하기를 기대했어요. 내 안의 빅데이터가 쌓이고 꼬이고 해석되는 과정에서 생겨버린 그 버그 많은 계산기가 작동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아끼고 사랑하면, 나도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은 내가 너무 순진한가요. 그냥 그 사람을 사랑하고 나도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함부로 평가하고 지레짐작해서 상처 주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나는 또 왜 이렇게 너덜너덜해졌나요.


이제 계산이 틀려도 틀리면 틀린 대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이제 정말 다시 마음을 꺼내어놓을 자신이 없습니다. 고장 난 계산기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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