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편하게 쉴 수 있을까. 끝없이 다음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마시멜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어렸을 때, 마시멜로 이야기가 참 핫했다. 당장의 욕망을 미루는 능력, 좋게 말하면 자제력이 성공에 미치는 영향 따위를 떠들어대는 어른들을 보며 짜증이 났다. 자기들은 눈앞에 작은 것도 참지 못하고 나한테 신경질을 부리면서. 매질도 서슴지 않으면서 뭘 그렇게 참으라는 건지, 뭘 그렇게 대학에 가서, 어른이 돼서 하라는 건지. 마시멜로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내게 저런 실험을 시킨다면 나는 당장 눈앞의 마시멜로를 먹어 치워 버릴 거라고. 씩씩 거렸다.
뽀뽀도 못 해보고
말은 그렇게 해도. 나중에 마시멜로가 10개든 100개든 어쨌든 늘어나면 좋은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난 끈기나 참을성 따위를 별로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지 않더라도 뭔가 많이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런 것 같고. 아무튼 원하지도 않으면서 원하는 이 애매한 성정 덕분에 나는 그런대로 다 미루면서 대충 어디 가서 무시받지 않을 만큼의 성정과 대충 모나지 않게 남들과 어울리는 척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건 다 미뤘다. 술, 담배는 물론, 종소리가 난다는 첫 키스가 뭐야. 그 흔한 입도 못 맞춰보고 대학에 갔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렇게 속아 놓고도, 10년을 더 속았다. 나중에 시간이 좀 생기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안정적인 직업을 찾으면. 그리고 나면 뭔가 좀 나아지겠지. 100개는 아니더라도 1개의 달콤한 마시멜로쯤은 내게도 주어지겠지. 외제가 아니어도 좋다. 국산이어도 좋다. 공장에서 만든 것이 아니어도 좋다. 텃밭에서 난 딸기라도 좋다. 딸기는 비닐하우스제니까 너무 고급인가. 아무튼 내가 살아온 날의 절반을 내 욕망을 미루는 데 다 썼는데 잠깐의 달콤함은 보상으로 주겠지.
더 이상 미룰 것도 없는데
시간도 생기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좀 생겼다. 나름 안정적(?)인 직장도 잡았다. 미뤄왔던 to-do 리스트도 꽤 많이 지웠다. 운전면허를 따고, 라섹 수술도 했다. 여자라서 무려 1년 동안 60만 원을 내고 맞아야 한다는 자궁경부암 주사도 3번에 걸쳐 노나 맞았다. 이제 진짜 미룬 게 없다. 악바리처럼 모아서 집도 샀고, 미뤄온 효도도 했고, 진짜 나. 해야 하는 건 다 했다. 그런데 이제는 하고 싶은 게 없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여유가 생기면 달라진다더니, 이젠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가 않다.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다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갖고 싶었던 건 사랑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랑도 현실 중 하나일 뿐이더라. 일도, 취미도, 운동도, 몇 번 멀리하니 쉽게 떠나가더라. 그냥 그렇게 모든 게 다 없어도 괜찮더라. 친구와 가족이라는 관계에도 기대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낫더라.
미루던 일을 끝내면
살아보지도 못한 집에 들어간 돈을 갚기 위해 쥐뿔도 없는 내겐 회사가 일시적으로 보장하는 신용이 필요하고, 자리에 앉아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그냥 열심히 고민해서 하게 되고, 하지만 또 오래 앉아 있을 만큼의 자제력과 인내심은 이미 한참 전에 바닥이 낫고, 떨어지는 생산성으로 꾸역꾸역 자리를 지키다 자정에 가까운 데도 택시가 잡히지 않는 퇴근길엔 뭐한다고 이러고 사나 싶고, 다음날은 알람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듣고 싶지가 않고. 다음날은 일찍 퇴근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괜히 일을 남겨두고 집에 와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다 우울해져 잠이 들고.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진짜 끝이 있는 걸까. 사주에라도 매달려 볼까. 참나. 평생 일 한단다. 근데 실익은 별로 없단다. 대운은 50대란다. 참나. 그때 돼서 마시멜로 100개 주는 건 그냥 나 10살 때 마시멜로 1개에 인플레 때려 박은 거 아니냐. 이게 본능을 거스르며 참고 참고 또 참은 대가라니. 염병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