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 그리고 나의 나 7화

by 설다람


정신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설 때가 되서야 겨우 눈이 감겼다. 하루가 빠른 속도로 접히는 것 같았다. 이미 접혀진 날들은 다시 펼칠 수 없었다. 다이어 교수가 따온 국가 과제를 하면서, 개인 연구를 해나가기 위해선 하루를 두 번 더 접어야 했다. 마지막 랩미팅에서 세록은 무능함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해내지 못했다. 굴욕적이었다. 그날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랩미팅에서는 무엇이라도 보여줘야 했다.

개인 연구 주제는 혈뇌장벽을 통과해, 비정상 세포만 추적해 제거하는 나노봇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높은 선택적 투과성으로, 혈액과 뇌를 분리시키는 혈뇌장벽은 약물의 접근도 차단시켰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이 장벽을 지나가는 것이 연구의 시작점이었다. 세록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광견병 바이러스에 있는 당단백질(RVG, Rabies Virus Glycoprotein)이었다. RGV는 신경내피세포와 신경세포에서 나타나는 수용체와 결합하여, 혈관 속으로 들어간다. 바이러스가 침투하고 나면, 면역체계는 완전히 작동을 멈춘다. 반대로 보면, 나노봇이 RVG처럼 혈뇌장벽을 뚫고 들어가 비정상 세포만을 겨냥해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RVG의 특이적인 구조를 모방할 수 있어야 했다.

광견병 바이러스 형태에서 파생시킨 32가지 나노입자를 유익 물질 운반체로 위장시켜 혈뇌장벽을 투과하는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1차 테스트에서는 모두 실패했다. 다시 모델링을 거쳐 128가지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국소적으로 삼투압을 높여 내피세포를 연결하는 밀착연접을 확장시켜 공간을 만든 뒤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투과율이 높진 않았으나, 조금 더 시도해볼 만한 여지가 있었다.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발표문을 다듬고, 자료를 띄워 실제 상황처럼 연습했다. 이전 랩미팅까지는 데이터를 마련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같은 방법으로는 같은 결과만 얻는다. 달라져야 했다. 우습게 보았던, 발표 슬라이드도 공들여 제작했다. 이미지 제너레이터의 명령어를 세밀하게 조정해, 보다 적합한 시각 보조 자료를 만들어 삽입했다. 고해상도 원본 파일과의 링크가 더해질 때마다, 데이터 볼륨이 커져 갔다. 클라우드와 연동했을 때, 나타나는 속도 저하 현상은 막을 수 없었다. 부득이하게 발표 파일 수정 작업은 로컬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부주의했다.


랩미팅 당일, 세미나실에 도착하고나서야, 세록은 태블릿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날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바로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가방 안에는 노트와 텀블러, 충전기만 들어 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왕복 한 시간이었다. 교통편이 불편해, 택시로 오가나, 걸어서 오가나, 큰 차이가 없었다. 속에서 나오는 욕을 참고 집에 돌아가려던 찰나에, 하미가 떠올랐다. 태블릿에 페이스락이 걸려 있어, 파일을 보내줄 순 없지만 들고 오는 것은 가능했다. 하미에게 전화 걸었다.



“하미 미안한데 태블릿 좀 가지고 학교로 와 줄 수 있어? 책상 위에 있을 거야.”

하미는 세록의 말을 따라 책상 위를 살폈다. 어지럽게 쌓인 공책들 아래에 태블릿이 숨어 있었다.

“찾았어. 어디로 가면 돼?”

“제2공학관인데, 주소 찍어줄게.”

링크가 도착했다. 도착지까지 예상 소요 시간은 도보로 34분이었다. 가볍게 걷기 좋은 거리였다. 하미가 옷가지를 챙겨입고 밖을 나서려다, 멈칫했다. 미토가 하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갈래?”

미토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미는 미토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밖은 아직 조금 쌀쌀했다. 맨션에서 나와서 오른쪽을 돌아 시장으로 들어갔다. 바로 앞에 있는 만두 가게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대 앞에 ‘집어 먹기’ 판에 올라간 만두를 출근하는 사람들이 집어갔다. 바쁜 사람들은 만두를 먹으면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만두를 입에 한 가득 넣고 달리는 학생도 있었다. 미토는 어제 태어난 아이처럼 모든 장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미는 지하철역을 지나서 다세대주택이 밀집된 언덕을 올랐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못할, 경로로 하미는 걸어갔다. 쓰러진 전봇대로 일부가 가로막힌 좁은 골목을 택하고, 시공 업체가 유치권을 행사 중인 반쯤 짓다만 건물 통로로 들어갔다. 대형 예식장 비상 대피로를 이용해 한 블록을 건너뛰기도 했다. 미토와 함께 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었다. 미토는 하미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갔다. 초등학교 담장 뒷길을 지나자, 한서대 병원이 나타났다. 제2공학관은 병원 너머에 있었다. 원래라면 왼쪽 대로로 나와 둘러서 가야하지만, 하미는 병원 지하 장례식장 내부로 들어가 통과하기로 했다. 2분이나 단축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

출입구로 들어가 한 층을 내려가니, 빈소가 나왔다. 한 빈소는 발인이 예정되어 있는지, 조문객들로 부산스러웠다. 복도를 가로질러 가려고 했을 때, 미토가 발을 질질 끌며 신음을 냈다.

“괜찮아. 겁먹지 마.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야.”

하미가 미토를 달랬다. 하지만 미토의 다리는 이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미가 미토를 안고 가려고 하자, 미토가 하미의 팔을 뿌리치고 장례식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하미는 잠시 당황했다가 미토를 잡으러 곧바로 뒤쫓아갔다.



30분이 지나도 하미가 오지 않았다. 위치 추적기를 확인하니, 의대 근처였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5분이 더 지나도, 의대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랩미팅 시간이 되었고, 세록은 클라우드에 남은 예전 자료라도 열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 뭘 했죠?”

세록은 1차 시뮬레이션 결과를 띄웠다.

“성공한 게 없는 것 같은데?”

“해당 데이터를 옮기지 못했습니다. 대신 구두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계획한…”

“아니, 잠깐 지금 교수랑 농담하자는 건가요?”

다이어 교수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번 발표도 그렇고, 미팅이 입으로만 떠드는 건 줄 아는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다음부터는 그냥 준비 못했다고 말하고 빠져요. 여기 있는 사람들 시간 아까우니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고, 누구도 소리 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세록이 말했다. 다음 순서 동료가 앞으로 나왔고, 세록은 자리에 앉았다. 한 발로 다른 발을 짓이겼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양말이 붉게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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