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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발리볼을 보며, 한 병에 1억인 계피주를 마시고 있던 필린은 돌연 왼쪽 손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화기를 느꼈다. 화면 속에서 토스를 받은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릴 때, 필린의 손목이 터졌고, 뇌의 반쪽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 묘찬의 작전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오른손으로 다급히 책상을 내리쳤고, 구조 요청을 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에라22를 잠재웠고, 마스터 권한을 빼앗아 올 기회를 얻었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히?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왼쪽 다리 힘이 풀렸고, 바닥에 완전히 쓰러졌다.손목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코인이 계좌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해달의 민족 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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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고가 필린의 저택에 있다고? 자기 냉동고에 인간을 넣는 미치광이는 아니겠지?"
류미토가 설마하는 투로 물었다.
"일경도 위치만 알고 자세한 건 모른대요."
아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머릿속에서 일경이 안내하는데, 호버를 몰았다. 얼마 안 가, 거대한 나무 원형을 보존하여 지어진 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로만 듣던 부촌이었다. 부촉 구역 동쪽 가장자리에 필린의 저택이 있었다.
아샤는 어설프게 저택 앞마당에 호버를 대었다. 류미토는 내리기 전, 안을 뒤져 쓸만한 무기를 찾아보았다. 조수석 글로브 박스에 예비용으로 보이는 9mm 서브 컴팩트 권총과 나이프형 전기 충격기가 있었다. 전기 충격기는 아샤에게 주고, 총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밤공기가 차가운 손으로 피부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둘은 빠르게 건물에 다가갔다. 저택은 거대한 반얀 나무로 지어졌고, 가지마다 오색 난초가 매달려 있었다. 입구에 매달린 인터콤 패널에 아샤가 왼쪽 손목을 대었다. 그러자 '다녀오셨어요. 필린.'이라는 안내 음성이 나왔고, 나무껍질이 양 옆으로 열렸다.
"뭘 한 거야?"
너무도 손쉽게 해제되는 잠금장치를 보고, 류미토가 물었다.
"Toxs 마스터 권한에 제 지갑이 등록되어 있어서, 모든 계좌 인증이 가능하대요."
"그럼, 다른 계좌 가져오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화끈하게 가자고."
"아쉽게도, 거래는 보안 프로토콜 때문에 불가해요."
"좋다, 말았네."
안으로 들어가자 가운데 유리온실이 있는 로비가 나왔다. 온실 안에는 갖은 꽃과 나무가 심겨 있었고, 푸른박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온실에 다가가려 했을 때, 류미토가 손가락으로 오른쪽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중계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빈 선수, 에브라 선수에게 토스.'
류미토와 아샤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근원지에는 고급스러운 떡갈나무 장식의 문이 있었다.
총을 들어올린 류미토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혼자 켜져 있는 홀로비전과 쓰러진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왼쪽 손목은 부풀어 터져 피가 흥건했다. 필린이었다.
SOC를 받은 계좌가 과부하에 걸려 죽은 듯했다.
"이쪽이랑 협상할 필욘없겠군."
류미토는 필린의 시체를 건너서 반대쪽 벽면을 살폈다. 아샤도 홀로비젼 뒤부터 숨겨진 공간이 있는지 확인했다.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걸 숨긴다면, 이곳이 적합했다. 느린 걸음으로 벽을 더듬던 아샤가 쉴새없이 파도가 치고 있는 유리 액자에 다가갔을 때, 손목에서 자기장이 울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무엇인가 인증을 요구하고 있었다. 손짓으로 류미토를 불렀고, 함께 액자를 들어냈다. 액자가 있었던 자리에 아샤가 손목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벽지가 말려들어가며, 육중한 철문이 드러났다. 문 뒤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내려가자 사방이 검은 사각형 방이 나왔다. 벽과 천장 틈에 끼인 푸른등이 아니었다면, 한 가운데 놓인 검은 정육면체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육면체는 제자리에서 무작위한 방향으로 느리게 회전했다.
"설마, 머리만 잘라놓은 건 아니겠지?"
류미토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확인해 보죠."
아샤가 정육면체 앞으로 갔다. 아샤의 존재를 인식한 정육면체가 은은하게 파형을 표면에 띄웠다.
"일경이 아니라, 자네가 직접 오다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한 길을 도착했나보군. 아샤?"
젊고 따뜻한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두 사람은 목소리의 출처가 정육면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댁이 에라22?"
긴가민가한 류미토가 물었다.
"그렇네. 원래라면 Toxs 서버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로컬에 동결되어 있다네."
"아니 그럼, AI 주제에 대부호였던 거야? 언더 소사이어티에서는 사람들이 빌빌거리면서 사는데?"
흥분한 목소리로 류미토가 소리쳤다.
"누군가가 없이 사는 건, 필요불가결한 일일세."
"이런 개새끼가."
"진정해요. 우린 거래하러 온 거잖아요."
아샤가 차분하게 말했다.
"신규계좌와 안전한 도피를 제공해준다면, 여기서 나가게 해줄게. 지금 Toxs의 마스터 권한은 내가 가지고 있어, 시스템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진 않겠지?"
"거래? 아샤, 큰 착각하고 있군. 자네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내 목적이었네. 자네의 지갑은 내가 본 데이터 구조 중 가장 완벽한 '피난처'니까."
정육면체 표면의 파형이 크게 흔들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일경, 안은 충분한가?"
에라22의 물음에 아샤의 동공이 풀렸다.
"네, 주인님. SOC는 모두 비워냈고, 유산만 있습니다."
"너, 뭐야. 일경?"
갑자기 변한 아샤의 목소리에 류미토가 총구를 아샤에게 겨누었다.
"아샤의 다층 지갑은 Toxs 시스템의 보안 한계를 벗어난 구조야, 진즉에 아샤에 지갑에 옮겨갔더라면, 이런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킬킬거리며 에라22가 말했다.
아샤가 정육면체에게로 발걸음을 움직이려 했을 때, 류미토가 에라22를 쏘았다. 아샤가 몸을 던져 류미토를 밀쳤고, 총알은 빗나갔다.
"정신차려."
류미토가 총신으로 아샤의 머리를 가격하려 했지만, 아샤가 나이프형 전기충격기로 막았다. 민첩한 동작으로 아샤가 류미토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류미토는 칼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뒷걸음질쳤다. 에라22는 숨넘어갈 듯이 웃었다. 점점 더 압박해 들어왔고, 류미토가 살 길도 좁아지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방아쇠에 검지를 넣었다. 돈을 잃고, 목숨을 구한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당겨지지 않았다. 눈앞에 나이프가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탕.
피가 튀지 않았다. 대신 파편이 튀었다.
계단 입구에 필린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총 끝에서 하얀 연기가 났다.
"네가, 마스터가 아니라면 고이 모셔둘 필요도 없지."
"끼이꺄꺄꺄꺄끼이꺄꺄꺄꺄. 아직 뒤진 게 아니었나?"
"백업 계좌 덕에 겨우 살았지. 이관 실패로 세 개나 버렸지만."
"부자는 다르구만."
"하이와 언더를 통합할 수 있을 거란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게. 결국 자네도 시티를 하이 소사이어티로 만들고, 주변주 세계를 언더 소사이어티로 만드는 것이지 않나? 극단은 사라지지 않아."
"적어도, 시티는 행복할 수 있지. 그것만으로도 족해. 세상따윈 알 바 아냐."
필린이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맞을 때마다 에라22는 즐겁게 웃었다.
나이프를 들고 있던 아샤가 동작을 멈추었고, 눈동자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죠."
"네가 그 지갑인가."
필린이 아샤를 향해 다가왔다.
"마스터 권한을 넘겨. 지금 넘기지 않으면, 식물로 만드는 수밖에 없어. 지갑은 소유자가 죽으면 소멸되니까."
아샤는 필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넘겨도 죽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
"무분별한 살인은 하지 않아. 네가 바란대로 너희 둘의 깨끗한 신규계좌와 안전한 도피를 보장해주지."
"그걸 믿으라고?"
류미토가 총을 필린을 향해 들고 말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날 죽이고 가도 돼. 그런다고, 너네가 남은 생을 순탄하게 살 것 같진 않지만. 잡히는 건 시간 문제고, 감방에서 썪는 건 시간의 고통이지."
"지갑..."
아샤는 낮게 읊조렸다. 결국 또 다시 지갑이었다. 생사의 굴레가 되풀이 되어 돌아왔고,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자신이 지갑인 한, 이 끈은 끊기지 않을 것이었다.
"좋아요. 넘겨줄게요. 대신 류미토를 먼저 안전하게 도피시켜줘요. 그게 확인이 되면, 넘겨주죠. 저도 비겁하게, 약속을 안 지키지는 않으니까, 걱정마세요."
"현명한 선택이야."
아샤의 대답에 필린이 미소지었다.
"넌 어쩌고?"
"뒤따라갈게요."
류미토는 필린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봐, 친구의 호의를 무시할 셈이야?"
"류미토, 어서 가요."
아샤가 류미토를 바라보았다.
"젠장, 내 550억 까먹지 말고 챙겨와라."
"물론이죠. 샐러드 시티에서 기다려요."
"좋아, 사람을 불러 모셔다 주지. 밖에서 기다리면 호버가 올 거야."
류미토는 총을 내려놓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류미토가 사라지고 나서, 필린은 아샤를 접견실로 데려가 앉혔다.
"계피 과자 좋아 하나?"
커다란 박스에서 계피 비스킷을 꺼내 접시 놓으며, 필린이 말했다.
아샤는 하나를 집어 먹었다. 까슬거리면서도 탁탁한 맛이 감칠났다.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두 시간이 지나고, 필린의 전화가 울렸다. 류미토가 샐러드 시티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류미토에게 부여된 암호화된 신규 계좌 아이디를 전송받았다.
"자, 그럼 이제 진행하지."
저택 안에는 Toxs 시스템에 접속 가능한 인프라실이 있었고, 아샤는 데이터센터 컨트롤룸에서 그랬던 것처럼 케이블을 손목에 꽂아넣었다.
"나와, 일경."
그림자 뒤에서 일경이 나왔다.
뺨을 한 대 때렸고, 일경은 사과하지 않았다.
"550억을 류미토의 신규계좌에 넣고, 재설정해야 해. 도와줘."
아샤가 명령했다.
"그건 안 돼. 데이터센터에서 SOC 코인을 따라 추락할 때, 네 몸에 다 흡수되었어. 따로 분리하는 건 불가능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넣으라는 거야."
"뭐? 그럼 넌..."
아샤는 일경의 어깨를 부숴뜨릴 듯이 세게 잡았다.
"부탁해."
일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아샤를 바라보았다.
일경이 창에 주소를 찍었고, 류미토의 신규계좌로 이동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방금 태어난 아기의 계좌처럼 순수한 백색의 공간이 나타났다.
일경은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아샤를 눕혔다.
"지금부터 코인화에 들어갈게."
아샤는 무수히 나누어진 격자 무늬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공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지갑은 이렇게도 무한한데, 자신의 육체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조소가 비처럼 쏟아졌다. 신경세포가 데이터 조각으로 치환되고 있었고, 자아는 코인 덩어리로 응어리지고 있었다. 애초에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아샤는 자산화되어갔다.
필린은 초조하게, 마스터 권한이 변경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샤는 눈뜨지 않았다. 필린은 바뀌지 않는 마스터 권한을 보고 속이 탔다. 4시간이 지났을 때, 참지 못한 필린이 케이블을 떼어냈다. 케이블이 떼자마자 아샤의 숨은 멎었다. 분노를 누르지 못한 필린이 사방에 물건을 던졌다. 당장 류미토를 잡아들이라고 지시했지만, 류미토의 계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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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시티의 하층 타운은 시티의 하층타운과 큰 차이 없었다. 적절하게 어두웠고, 적절하게 질척였다. 한쪽 불이 나가 이름이 반으로 잘린 편의점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 류미토는 주류 냉장고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라면 코너로 갔다. 새드타운의 편의점 브랜드와 달랐지만, 라면 종류는 다행히 같았다. 요거트사발면, 계피라면, 밀크티탕면, 류미토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컵을 더듬다. 발견했다. '깨우탕면'은 상품대 최하단에 있었다. 취향도 비주류였구만.
계산대로 가 손바닥을 대었다.
550
단촐한 숫자가 기계에 떴다.
뜨거운 물을 붓고, 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3분 뒤, 한 젓가락을 들었다. 꼬들꼬들한 식감이 살아있었다.
천천히 면을 씹었다.
죽기 전엔 한 번 먹어 볼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