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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Mar 03. 2021

낯선 거리 (8/10)

  삼십 분가량의 토막잠이었지만 몸이 훨씬 가벼웠다. 오늘 하루, 두 번째 출근을 위해 다시 동작역 쪽으로 걸었다. 지하철 출퇴근을 하게 되면 사람들의 옷차림과 행동만 보더라도 세상의 유행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지하철 의자에 앉으면 잠시라도 쪽잠을 잘 수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동작 철교와 63빌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멋진 석양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올해 봄, 주방을 맡은 이후로는 옷에 밴 음식 냄새와 승객들의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나마 마음이 편한 자리는 지하철 차량과 차량 사이의 연결 통로였다.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해 보기 위해서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 식당에 손님이 줄어든 만큼 재료비 지출도 줄었다. 원가를 더 절감하려고 식자재를 중국산으로 바꿨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맛이 달라졌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손님은 아직 없었다.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비상수단은 다 썼다. 오직 임대료만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돈 문제가 아니라, 큰 집 갈 수도 있어!”

  식자재 바꾸는 문제를 마무리 짓고, 정석이 식당을 나가면서 불쑥 던진 말이었다. 나는 그깟 걱정은 하지 말라고, 나이 들더니 뻥만 늘었다고 하면서 웃어넘겼다.      

  이번 정차 역은 종각역이라는 안내 방송에 정신이 들었다. 오전 출근 무렵의 종각역이 전투적이고 비장한 표정이라면 오후 다섯 시의 종각역은 한결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같은 거리, 같은 장소라고 해도 바라보는 마음의 각도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달랐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채비를 서둘렀다. 예상했던 것처럼 손님은 많지 않았다. 저녁에 가장 많이 나가는 메뉴는 팔천 원짜리 제육덮밥이었는데 오늘은 네 그릇 팔았다. 여섯 시가 되자 1층 현관의 경비 아저씨가 내려왔다. 전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꼬박 하루를 근무한 뒤, 한 시쯤 내려와서 김밥 한 줄을 먹고 퇴근하기를 십 년가량 했다. 내가 반갑게 알은 척을 하자, 제육덮밥을 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 있느냐는 식으로 내가 웃으며 바라보자, 오늘이 만으로 예순다섯 생일이라 정년퇴직하는 날이라고 했다. 파산 후에 아저씨는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마누라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전은분식 김밥 덕분에 잘 버텼다고 했다. 나는 소주 한 병을 꺼내고 잔도 챙겨왔다. 퇴직기념 서비스라고 했다. 소주 반병을 남기고 문을 나가던 아저씨가 멈춰 서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넘어졌을 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오직 한 사람만 있으면 돼”     

  새로 들어오는 손님 때문에, 간단히 인사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제육덮밥에 소주 한 병을 기울이고 퇴근하는 손님이 두 명 더 있었다. 쓸쓸한 어깨와 뒷모습이 은행원 시절의 내 모습 같았다. 그런 손님이 있기에 얼마 안 되는 저녁 장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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