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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Mar 06. 2021

낯선 거리 (10/10)

  밖으로 나왔다. 늦여름 밤의 거리는 한산했다. 시청역 출입구가 가까웠는데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아침에 챙긴 우산이 백팩에 들어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오랜만에 비를 맞으니 시원했다. 빗방울이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을 연결해주는 어깨동무 같았다.


  거실의 불을 켰다. 아내가 오후처럼 책장 가운데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특별히 길었던 하루였네, 애 많이 썼어, 당신…… 토닥토닥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아내의 입술에 마스크를 낀 채로 키스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지난 이십이 년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입술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어릴 적 살았던 북한산 자락의 허름한 한옥이 아스라이 굽어 보였다. 뒷마당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걱거렸다. 아내가 준수에게 뭔가 속삭이는데 내겐 들리지 않았다. 나와 아내와 준수가 어깨동무를 하고 대나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웠지만 무섭지 않았다.


  목이 타는 갈증 때문에 잠에서 깼다. 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거실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둑어둑한 메타세쿼이아 우듬지 사이로 부유스름하게 새벽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비어 있는 준수 방으로 느릿느릿 들어갔다. 컴퓨터를 켰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작은 액자 속에 나는 없고 아내만 있었다. 한글을 띄웠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탁탁탁 탁탁탁 글을 쓰고 인쇄 버튼을 눌렀다.

   “전은분식(1998~2020)을 사랑해주신 고객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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