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릴 100년
일본 경제는 눈부셨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웃나라에서 터진 6·25 전쟁의 특수를 톡톡히 누리면서 다른 패전국들과 달리 1950년대부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은 일본 경제의 정점이었습니다. 1970년대 오일 쇼크를 너끈히 견뎌내고, 그나마 있던 후유증마저 털어내면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투자붐이 일었습니다.
투자의 대상은 주식과 부동산이었습니다. 주식가격과 부동산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습니다. 당시 가격 기준으로는 일본 전 국토를 팔면 미국 전체를 4번 사고도 남았습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도 나돌았습니다.
일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 세계 2대 강국이었습니다.
붕괴는 순식간이었습니다.
1990년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은 급락했습니다. 일본 자산 가격이 거품 위에 있었다는 것(Japanese asset price bubble)이 명백해졌죠.
이른바 '잃어버린 10년(The lost decade in Japan)' 또는 최근까지 이어지는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습니다.
2025년 현재, 일본은 미국 GDP의 13.7% 수준으로 세계 5위 자리를 간신히 지키고 있습니다. 1인당 GDP는 이미 우리나라에게 추월당했고요, 대만이나 슬로베니아 보다도 낮은 수준입니다. OECD 중위 가처분 소득은 폴란드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미국입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시 맨해튼에 있었던 건물, 현대 자유경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세계무역센터(WTC; World Trade Center)가 테러를 당해 무너졌습니다.
오전 8시 46분, 왼쪽 쌍둥이 빌딩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고, 뒤이어 오전 9시 3분, 오른쪽 건물마저 비행기 테러를 당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9.11 테러입니다.
경제씬에서 이에 버금가는 사건이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입니다.
이 사태는 세계 경기 침체, 양극화 등 지금까지 진행중인 대부분의 경제 문제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물리적 충돌 뿐 아니라 세계화에 제동을 걸며 신냉전 구도를 불러일으킨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9.11 테러와 비견될 만큼 대단한 세계사적 사건이지만 그 원인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서브프라임(subprime)에게 모기지(mortgage)를 대량 공급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신용 7등급에게 주담대를 마구 퍼주었다는 겁니다.
세계 2위의 초강대국을 주저 앉힌 것도, 심지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단일 패권 국가의 경제에까지 상처를 입히고, 아직까지 세계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도, 모두 부동산이 원인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를 조금만 더 살펴보면요, 당시 경기가 한창 호황 국면일 때 일본 당국은 부동산 경기 부양 정책을 힘차게 시행했었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높았던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르자, 주요 대도시 실수요자들은 자신 소유의 집을 갖지 못한 채 도시 밖 근교로 밀려났습니다. 이들의 불만과 불안감은 상당했죠.
결국 일본 정부도 부동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데에 동의하고, 부동산 가격 안정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문제는 그 선회가 너무 급격했다는 거죠. 예를 들어, 기준금리를 2년만에 2.5%에서 6.0%로 어마무시하게 올려버렸습니다. LTV는 200%에서 70%로 무려 130%나 내려버렸고요. 담보 가치가 폭락하자 부동산 시장의 수요도 함께 주저앉았고, 당연히 가격도 폭삭 무너졌습니다.
가계는 담보를 처분해도 대출을 갚지 못하게 됐고요, 부실 채권을 떠안은 금융기관들이 대거 쓰러졌습니다. 소비심리와 투자심리가 모두 바닥을 기었고요, 소비할 돈도 투자할 자금도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일본은 이미 기초 체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고, 일본 경제는 더 깊은 어둠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미국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서 정반대의 정책을 폈습니다. 금리를 인하하고, 양적완화(QE; Quantitative Easing)를 비롯한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미국은 지금도 세계 1위의 초강대국으로 남아있지만, 미국 부동산발 경제위기가 전세계에 끼친 영향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을만큼 막대했습니다.
금융 시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양적완화로 인한 달러화 약세와 미국의 경기 침체로 인해 무역으로 먹고 살던 나라들이 크게 휘청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경제 위기가 그렇듯, 결론은 늘 양극화의 심화로 마무리 되었고요.
부동산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이 정도로 큽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요.
감히 단언컨대, 일본이나 미국보다 그 여파는 훨씬 더 강할 겁니다. 10년, 30년이 아니라 100년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첫째, 우리나라는 가계 대출이 너무 많습니다. 가계의 소득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에요.
그런데 그 대출 중에서도 주담대 비중이 너무 높습니다.
만약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담보를 처분해도 대출을 다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요? 심지어 금리가 대출 받을 때보다 높아져서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진다면요?
아찔합니다.
둘째, 대출 뿐만이 아닙니다. 자산도 그렇습니다. 자산 중 부동산 비중도 엄청 높습니다.
만약 집값이 떨어진다면 내 자산 가치도 그에 따라 그대로 떨어지는 겁니다. 만약 부동산이 아닌 금융자산의 비중이 높은 상황이라면 집값 떨어지는 걸 현금으로 충분히 완충할 수 있을 텐데, 부동산 비중이 워낙 높다보니까 쿠션 역할을 할 게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노년층의 부동산 비중이 상당히 높습니다. 소위 하우스푸어(house poor)도 노년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동산 가치 하락은 곧 삶의 질 하락과 같습니다.
셋째, 부동산이 우리 기업들에 미치는 영향이 압도적입니다.
직관적으로는 건설업계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큽니다. 단지 현대건설이니 GS건설이니 하는 곳도 그렇지만요, 연관된 2차-3차 업체들이 엄청 많습니다.
예를 들어, 창문을 달아야 하니 KCC 같은 곳이 있고요, 내부 인테리어를 해야 하니 LX 같은 곳이 있습니다. 보일러를 깔아야 하니 린나이가 있고요, 인터넷을 새로 연결해야 하니 SKT 브로드밴드가 있습니다.
중소 수리업체도 있고요, 입주청소업체도 있고요, 또 전국에 복덕방은 얼마나 많습니까.
부동산 시장에 빙하기가 찾아오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통장에도 빙하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동산들이 있습니다. 바로 기업들이 땅 장사를 한다는 겁니다.
가령 2017년 기준 국내 5대 기업(삼성, 현대차, SK, LG, 롯데)의 토지자산은 75.4조 원인데, 이건 10년 전에 비해 3배나 불어난 규모입니다. 직접 토지를 매매하며 시세차익을 내기도 하고, 목 좋은 땅을 사서 임대를 놓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기업들의 포트폴리오에서도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 기업들의 유동성 확보에 큰 타격을 줄 겁니다.
앞으로 재테크로서의 부동산은 빛을 잃을 거라고 봅니다. 시기의 문제이지, 분명 머지 않아 이럴 때가 올 거라고 봅니다.
전망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나 소망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부동산 버블이 일본처럼 꺼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서민들에게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올 수 있으니까요. 우리 경제에 씻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 있으니까요.
부동산 거품 붕괴는 위험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송두칠 doo7@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