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살에 퇴사를 하고 요가 강사가 되었다. 벌써 작년의 일이다. 이제 마흔살에 요가 수업을 시작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코로나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살짝 기뻤다. 이참에 요가 수업을 좀 더 준비하고, 새로운 수업도 적극적으로 구해보자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사실, 2003년도의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도 대학생 때 겪었는데 별 일이 없었다. 2012년도의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는 직장인일 때 겪었는데 마찬가지로 별 일이 없었다. 여기에서 '별 일이 없었다.'의 의미는 방역 위생 상의 경각심만 높아졌을 뿐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는 말이다. 특히 돈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2020년, 현재의 코로나는 완전히 반대이다. 별 일을 다 겪게 하고 있다. 수 많은 별 일 중에 세 가지만 말해보자면, 그 중의 첫 번째는 생활체육시설 운영 제한 조치로 2월 24일부터 한 개의 수업을 제외하고 모든 수업이 무기한 휴강 중에 놓인 것이다. 수업이 없으니 버는 돈이 없어서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아주 작은 수련 공간이나마 마련해 볼 요량으로 모아 둔 적금을 깰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서울시와 정부의 재난지원금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공과금 등의 고정비를 제외한 식재료, 공산품 등의 생활비에 대한 부담만 덜어도 큰 도움이다.
이렇게 코로나에 한 차례 싸다구를 맞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도, 수업이 열릴 때를 대비하여 요가 수업도 준비하고 면접도 다녔다. 동네 요가와 동네 명상이 추구하는 삶이므로, 그 터가 될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강사를 구하는 곳은 물론이고 강사를 구할 법한 곳에도 일단 들이댔다. 그러다가 인연이 닿게 된 곳이 바로 절이었다. 절의 웹사이트를 찾아보고 대표 메일 계정으로 수업 소개 내용을 보냈다. 그런데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답신이 없었다. 이래저래 자신감이 떨어져 있던 때라서 무엇이 부족한지 궁금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메일로 요가 수업에 지원한 두뺨입니다."
"네?"
"아, 요가 수업이 필요하실까 해서요, 선생님. 제가..."
"우리 요가 수업 없어요. 그리고 나는 선생님이 아니고 스님입니다."
"아아, 네네. 제가 요가 강사인데, 혹시 수업을 열 수 있을까 해서요. 선생님."
"선생님 아니고 스님. 불자인가요?"
"하하하, 선생님이 입에 베서요, 스님. 아, 불자는 아니에요."
"그럼, 기독교?"
"무교입니다. 스님! 그런데 수업을 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당돌하네요. 지금 시간되면 들러요. 차나 한 잔 마시게요."
"네, 스님!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퇴짜를 맞더라도 가서 이유나 들어보자라는 심산으로 걸음을 재촉해서 '법룡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통화를 했던 스님을 찾아서 인사를 드리고 옆자리에 앉았죠. 허허실실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스님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오란다고 진짜로 왔네?"
"네, 스님. 차 한 잔 내어준다 하셔서 왔습니다."
"어디 얘기해봐요."
"근데요, 스님. 문을 들어서려는데 복도에 풍경이라는 포스터가 있더라구요. 시도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그래서 저는 과감히 시도하려고 합니다. 요가 수업을 하고 싶습니다."
스님이 몸을 틀어서 저를 요리조리 뜯어봅니다. 저 역시 스님을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제가 본 스님은 마치 어린 아이 같았어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습니다.
"제 이야기 들어보시고 거절하셔도 돼요. 스님!"
그렇게 대화의 물꼬가 제대로 트입니다. 이자저차 해서 작년에 퇴사를 했고, 쉬는 동안에 요가 강사가 되었으며, 평소 불교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집 근처에 법룡사가 있어서 요가 수련도 함께 하고 불교 문화에 대해서도 알아나가고자 한다...스님께서 한참을 듣고 계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명색이 여기가 포교하는 곳인데,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요가 수업을 맡길 수가 있나. 그런데 3월부터 여기에서 우담바라 불교대학 입문과정을 열거든...그걸 먼저 배워보면 어떨까?그럼, 어떤 사람들이 오는 지도 알 수 있을테고 말이야. 어때?"
봉은사와 월정사에서 템플스테이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던 터라 스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스님을 영업하러 가서 역으로 스님에게 영업을 당하고 나왔죠. 그렇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스님과 이렇게 깊은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이고, 무언가 친구를 사귀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대학도 코로나 때문에 개강 시기를 계속 바꾸며 미뤘습니다. 9월로 예정된 개강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죠.
코로나로 생긴 별난 일의 마지막은 희망고문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갈 데가 제한되었으니, 사람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해지더라는 겁니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으니, 젊음만 믿고 여기저기 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죠. 3월말에는 괜찮아지겠지. 4월말에는 괜찮아지겠지. 5월에 등교가 시작되면 괜찮아지겠지. 6월이면 나아지려나. 7월은 어떠려나. 한여름 8월 지나서 9월에 가을이 오면 정말로 어쩌려나.
희망 고문 중에 재취업을 생각해봅니다. 다시 직장을 잡으면 꼬박꼬박 월급은 나오겠지. 세상 보는 눈이 이전과는 달라졌으니, 추구하는 삶과 안정적인 삶을 병행할 수 있지 않을까. 계획대로라면 올해 불교대학원을 다녀야 하고 책도 한 권 내야 하는데, 브런치에 글도 꾸준하게 발행해야 하고, 새로운 경험을 찾아 모험을 찾아야 하는데. 이불더미만 파고 듭니다. 의지가 박약한 것인가. 스스로를 자책도 하고. 모든 것은 흘러가기 마련이라며 스스로를 위로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코로나에 쌍싸다구를 맞았어요. 그래도 정신을 차려봅니다. 인생 최초의 요가 개인 레슨도 시작하게 되었죠. 사방이 뚫린 공원에서 2미터를 확보하고, 마스크를 쓴 채로 말입니다. 집에서 엄마랑 티격태격 코믹요가만 하다가 정식으로 개인 레슨을 하면서, 공부도 시작했어요. 인체 해부학에 대하여, 요가와 명상에 대해서요. 4개월만에 집 앞에 있는 커피 숍에 나와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마시지는 않고 자리만 차지하여 글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