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패션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옷도 머리도 신발도
꾸미는 것에 센스가 굉장히 없다.
청록색티셔츠와 남색 바지, 진회색 맨투맨과 연갈색 운동복 바지를 입는 남자다.
2.
여행을 가면 'I♡NY' 같은 지역 티셔츠를 기념품으로 사기도 한다.
사고 난 뒤 통상 옷장에 넣어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평소에도 그런 티셔츠를 잘 입고 다녔다.
3.
여자 친구는 패션에 관심도 많고 감각도 좋아서
어울리는 색깔이나, 매칭하면 좋은 것들을 잘 골라준다.
출근할 때나, 외출 전에는 여자 친구에게 최종 검사를 받는다.
4.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굉장히 제한된 재료로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 미션이 있는데,
거기서 고군분투하는 요리사들처럼,
여자 친구도 제한된 내 옷가지들로
최고의 코디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5.
여자 친구의 옷을 사러 쇼핑을 갈 때면
같이 골라주거나, 어울리는지 의견을 주곤 하는데,
나는 내 옷을 살 때, 유독 방어적으로 군다.
여자 친구가 입어보라고 하면
두세 번은 안 입는다, 안 산다, 괜찮다고 거절하고
(나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옷을 들고 피팅룸을 가게 된다.
6.
여자 친구는 내게 옷 한 벌 사입히는데도
여러 번 잔소리를 하는 것이 못마땅할 텐데,
속사정도 모르는 누군가가
"두버지 옷 좀 사입혀드려라, 맨날 같은 옷만 입네."
하는 소리를 들을까 억울할 것이다.
7.
유독 내가 고집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지를 살 때 주머니가 4개 이상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본 주머니가 좌/우에 하나씩 있지만,
건빵 바지처럼 추가적인 수납공간이 2개는 더 있어야 한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반바지는 주머니가 7개였다.
8.
나는 외출 중에 두 손 중 한 손은 자유롭길 원하고,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머니로 모든 수납을 완료해야 한다.
9.
내 주머니의 구조는 이렇다.
왼쪽 메인 : 스마트폰은 다른 것들과 함께 주머니에 넣지 않고, 단독 보관한다.
오른쪽 메인 : 자주 꺼내는 물건을 보관한다. 주로 베이프다.
왼쪽 서브 : 차키와 집키, 자주 꺼내지 않는 물건들
오른쪽 서브(지퍼나 단추로 잠금이 가능한 쪽) : 외국이다 보니 항상 신분증을 휴대하고 다닌다. 운전면허증과 카드지갑을 보관한다.
10.
출근할 때는 가방을 들고 가기 때문에
주머니가 2개인 바지로도 커버가 가능하지만,
외출할 때는 무조건 4개 이상이 필요하다.
"그 바지 좀 그만 입어 제발."
"아니야, 이거 입을래."
(나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11.
여자 친구 덕분에
밝은 색 옷도 사보고, 내게 어울리는 스타일도 찾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패션에 수동적인 남자지만,
절대로 같이 입으면 안 되는 것들은 기억하고 있다.
12.
며칠 전 여자 친구가 새 티셔츠를 골라준 적이 있는데,
처음엔 안 입어본다고 괜찮다고 거절했다가,
막상 입어보니 너무 내 마음에 들어서 바로 사게 됐다.
여자 친구는 내가 어떤 재질, 핏, 색깔, 문양이 어울리는지 참 잘 알고 있다.
13.
패션에 있어서 여자 친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다.
나는 여자 친구의 패션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고, 그저 받기만 한다.
내 옷장은 여자 친구가 골라준 옷들로만 차있는데,
여자 친구의 옷장에는 내가 골라준 옷이 한 벌도 없다.
한 벌 정도는 내가 골라준 옷이 여자 친구의 옷장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내가 옷 골라줄게, 고마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