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수염을 기른다.
콧수염과 턱수염 둘 다 기르고 있다.
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나서부터 길렀으니,
6년 정도 된 것 같다.
2.
한국에서 직장인이 수염을 기르는 건 흔하지 않다.
내가 수염을 기르게 된 계기도 이것과 연관이 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입사한 회사를 꽤 오래 다녔는데,
퇴사 후에도 출근하는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느덧 시동을 걸고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3.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한국의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으면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자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퇴사 후 수염을 기르게 됐다.
(매일 아침 면도를 하는 게 귀찮기도 했다)
4.
말레이시아에서는 수염을 기른 모습은 누군가의 눈길을 끌진 않았다.
길 가다 보이는 남자 중 반은 수염이 있다.
(한국인 중에서도 몇몇 기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왕 기르는 거 멋있게 관리하고 싶어서 몇 가지 제품을 구매했다.
롤러, 오일, 포마드 : 시작할 땐 이것저것 다 샀는데 결국 얼마 안 쓰고 보관함으로 갔다.
트리머 : 2종류의 트리머를 샀다. 하나는 전반적인 길이를 맞추기 위한 이발기 크기의 트리머, 두 번째는 수염 끝을 다듬기 위한 작은 크기의 트리머. 쓰던 게 망가져서 한 번 새로 샀었고,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
가위 : 비죽 튀어나온 수염을 자르기 위한 작은 가위를 샀었다. 아주 가끔 쓴다.
빗 : 빗도 여러 개를 샀었다. 나무로 된 참빗도 샀었고, 삼각자 같은 플라스틱 빗도 샀고, 구둣솔처럼 생긴 멧돼지털 빗도 샀었다.
5.
잡다구리 하게 산 수염관리용품 중
가장 맘에 드는 건 멧돼지털 빗이었다.
멧돼지털 빗은 꽤 억세서 몇 번 슥슥 솔질만 하면 수염결 정리가 잘됐다.
인그로운 예방도 되고, 각질도 없어졌다.
무엇보다 빗질 후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머리에도 솔질을 해봤는데 꽤 아픈 걸 봐선 수염용이 확실했다.
억센 털끼리 통하나 보다
6.
몇 년 기르다 보니
수염을 기른 모습이 자리를 잡고
하나의 개성이 됐다.
여자 친구는 내 수염이 잘 어울리고 멋있다고 해줬다.
그건 참 다행인 것 같다.
7.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몇 번 수염을 깎은 적이 있다.
연애 초반에 수염에 찔리는 게 아프다고 해서 깎았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처음 뵈러 갈 때도 깎았다.
그 뒤로 몇 번 더 뵙고 인사드리면서는 수염을 기른 모습도 보여드렸다.
(수염을 기른 모습이 개성 있어 보이고, 잘 어울린다고 해주셨다)
8.
결혼식 때 수염을 깎아야 하나 고민을 했었다.
현재로선 안 깎고 하는 걸로 결론을 내리긴 했다.
아버지는 내가 수염을 기르는 게 영 못마땅하신지
볼 때마다 깎으라고 하신다.
손님이나 어른들께 예의가 아닌 건가 싶다가도 요즘 세상에 촌스러운 고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 친구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고, 안 깎는 게 더 낫다고 했었다.
(깎으면 입술이 옹졸해 보인다)
9.
나는 머리칼은 굉장히 얇고 부드러운데
수염은 이와 상반되게 엄청나게 억세다.
머리는 탈모가 올까 봐 걱정이고,
수염은 힘을 좀 빼도 괜찮을 텐데 기미가 안 보인다.
반대가 됐다면 엄청 좋았을 거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