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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얌전한고양이 Aug 18. 2021

아빠 취미 만들어주기

말하는 걸 좋아하는 아빠, 글 쓰는 건 어때요?

아빠는 늘 그랬다. 앉아서 TV를 보거나 누워서 휴대폰을 보거나, 누워서 TV를 보거나 앉아서 휴대폰을 본다. 요즘은 일을 쉬는 상태라서 더더욱 그렇다. 주로 보는 건 격투기 영상, 주식강의 영상, 잡다한 지식을 다루는 채널들이다. 저녁이 되면 엄마는 필라테스를 하러 나가고, 동생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고, 나는 글을 쓰러 공부방에 간다. 아빠는 늘 거실에서, 같은 자리를 맴돌며 늘 비슷한 주제의 영상들을 본다. 일을 못하고 있는 아빠는 평소에 꽤 자주 마트에서 장을 봐온 걸로 요리를 해주기도 한다. 설거지와 빨래도 한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취미가 없다.


항상 본인을 위한 삶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일을 할 때는 일 하느라 바빠서 심심할 틈도 없었지만, 일을 할 수 없는 지금은 많이 초조한 거 같다. 일만 하던 사람이 일이 없어지고 취미도 없는 상태에서 엄마와 나는 일하러 나가고 빈 집에 덩그러니 남겨지니 미안하고, 초조하고, 심심하다. 그래서 늘 가족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 호의를 베푼다. 어쩔 때는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보다는 베풀었을 때 아빠 스스로 마음이 편해지는 도움이 많은 거 같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되면 어쩌다 한 번은 필요해서 도움이 되지만, 나머지는 부담과 불편함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지친 나머지 자리를 피한다. 아빠의 마음 상태는 심화되고 관심과 호의도 심화되고 우리의 부담과 불편함도 심화된다.


아빠는 말하는 걸 좋아한다. 정확히는 말하는 것만 좋아한다. 본인은 대화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빠는 말하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 맞다. 본인의 일에 대해, 유튜브와 인터넷을 보고 알게 된 것에 대해, 경제와 정치에 대해, 그리고 눈에 띄는 모든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 대화의 소재들은 유익하다. 다만 문제는 아빠는 본인이 아는 것보다는 말하고 싶은 게 훨씬 많다. 말할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설명하면서 정리'된'다. 유튜브로 비유하자면 딱 1분 만에 끝날 내용을 20분으로 늘린 영상에 중간중간에 광고로 도배된 걸 보는 거 같다.


알맹이가 없으니 들어봤자 의미도 없고, 내용이 사실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내가 대화를 시작하려고 소재를 꺼냈는데 그걸 아빠가 1%라도 알면 갑자기 강사로 변신하고 '내가 하려던 얘기'를 나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 또한 유튜브에 빗대서 표현한 윗 단락의 내용처럼 된다.


그러다 보니 아빠의 말을 점점 안 듣게 되고, 아빠도 말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적어졌다는 게 말하기 싫어졌다는 게 아니다. 하고 싶지만 본인이 입을 열면 가족들이 피하는 게 보일뿐이다. 조금이라도 아는 게 나오면 입이 근질근질한 게 다 보인다. 알려주고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우리 아빠, 어쩌면 나보다 아빠가 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별로 어렵진 않을 것이다. 표현의 수단이 음성에서 글로 바뀔 뿐이다. 그리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라도 글로 써서 본인 눈으로 직접 보면 본인이 봐도 재미없고 지루하니 알아서 수정을 거듭하고 어느새 정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빠의 말을 무조건 피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 설명하고 싶은 것들은 글로 써달라고 해야겠다. 도저히 안 되면 1줄짜리 일기라도 쓰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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