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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호리 Aug 31. 2015

비범(非凡)해진 '평범한 일상'

'보통의 삶'을 동경하는 너무 특별한 우리들

한 달에 한두 주, 새벽 근무를 한다.


기상 시간은 대략 4시 반 정도다. 매일 일찍 일어나는 얼리버드(early birds)들에게는 그리 특별한 시간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보통 9 to 6의 리듬에 맞춰 생활하는 '보통의 남자 직장인'에게 달마다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리듬의 변화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해외 출장 후 시차(時差) 적응을 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같다.  4시간의 시차면 동쪽으로 뉴질랜드나 하와이 중간쯤, 서쪽으로 인도나 모스크바에 다녀오는 것과 비슷하다. 갑작스러운 리듬의 변화는 수면장애, 판단력 저하, 두통, 불안 등의 증상을 가져온다.


시차 증후군(jet lag syndrome) : 시차(時差) 때문에 일시적으로 피로해지거나 멍해지는 등 신체의 리듬에 이상이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원래의 신체리듬과 현지의 생활리듬에 차이가 생기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제3의 피로라 불리기도 한다. 주로 피로, 집중력ㆍ판단력 저하, 수면 장애, 위장 장애, 두통, 불안 등이 증상이 나타난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인적 없는 새벽 출근길


그런 이유로 오후가 되면 판단력이 저하된 '멍한 좀비'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 가령, 직장 동료가 "오늘 머리가 굉장히 내추럴(natural)하시네요~"하고 반갑게 말을 건네면 "뭐라고?  뇌출혈한거 같다고?"라고 반응한다던지, 칫솔을 치약에 발라 갖다 댄다던지. 이를 닦고 칫솔을 털다가 힘이 빠져 칫솔을 소변기로 던져버린다던지.. (실제로 겪은 일들이다.)


이를 가엾이 여긴 상사께서
조기 퇴근을 허하셨다.



남들보다 일찍  퇴근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리 반길 일만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잉여'의 시간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일찍 들어가는 날엔 무기력증과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잠에 취했다가 정작 자정을 넘겨가며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러다 1~2시에 잠이 들면, 전날 보다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진행됐다.




악순환을 끊자


어느 날 이런 무기력의 악순환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몸을 더 피곤하게 해서 숙면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진즉에 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제야 생각이 난 것일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저항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령 일찍 집에 가서 에너지가 있다면 집안 일을 해야 한다던지.. 아이들과 뒹굴며 놀아야 한다던지...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활기'를 찾겠다고 생각하니 몸은 금방  적응했다. 사고와 행동의 변화는 나에게 '신세계'를 열어줬다.


가령, 언제나 붐비는 맛집을 찾아가 여유롭게 음미한다던지, 요즘 '핫하다'는 이마트타운이나 판교 현대백화점 같은 곳에서 부대낌 없이 쇼핑을 한다던지, 넓은 극장 정중앙에 앉아 영화 평론가로 빙의하거나, 한적한 한강공원에 가서 강을 바라보며 세월을 낚는다던지... 좀 더 나가 재벌 마냥 놀이공원에서 나만을 위한 회전목마나 롤러코스터를 돌리는 것이다.


아쿠아리움 대수족관 앞에서 이렇게 사진 찍어보신 분?


취미도 생겼다. 아이가 생긴 후 거의 찾을 일 없었던 극장. 요즘은 거의 모든 개봉작을 찾아보고 있다. 좋아하는 일본 감독의 DVD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찾아보는 덕질까지. 오늘은 집 앞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음악을 들으며 4시간 동안 한 번도 자리에서 뜨지 않고 책을 읽었다. 행복했다. 이것이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앞서 '신세계'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따져보면 맛집 탐방, 영화 관람, 독서, 커피숍 등이 그리 특별한 일들은 아니다.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일들. 하지만 요즘 이런 평범한 일상을 '흔히' 또는 '편히' 누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살면서 매순간을 특별히 기념하려 한다. 매일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근사한 장소에서, 특별한 사람과 만나고 싶어한다. 마치 특별하지 않은 순간은 가치를 잃은 시간인 듯 느껴진다.


그렇게 페이스북에 기록되는 특별한 일상이 하루 10억 개가 넘는단다. 지금까지 모인 이 '특별한 일'들이 무려 2조 개나 된다고 한다.



모든 이의 하루가
특별한 일들로 채워지고,
'평범(平凡)한 일상'은
비범(非凡)한 일상이 된다.



전직 요정 이효리의  소박한 전원생활이 동경의 대상이 되고, 케이블 TV의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유럽 아티스트들의 소박한 삶의 장면을 담은 킨포크(Kinfolk)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의 드렌드를 보면, '일상과 특별함이 역전된 시대'라는 생각이 비단(非但)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바쁜+일상>이란 말이 마치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돼 버렸다.  '안바쁜일상'이란 말을 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 인류가 바쁘다. 심지어 초등학생 우리 애마저 바쁘다고 한다. 나는 이 '바쁜일상'이란 말이 '허울'처럼 느껴졌다. 실체가 없지만 너무나 당연한 전제.


우리가 바빠야 할 일은 누군가로부터 마감시간이 촉박한 일을  부여받았을 때 밖에는 없다. 그 또한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대부분 욕심이다. 초조함 때문에 스스로 만든 일이다. 자기가 바쁘게 만들었기에 반대로 자신이 바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즉, 안 바쁜 삶을 살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바빠야 하는' 강박을 벗으면 될 일이다.


이제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보통의 일상들'

사실 특별하지 않을 권한이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호들갑스러운 내 일상에 대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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