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의 나뭇잎 소설 2 ㅡ 함께 걷는 길]

길이 사람을 데려다준다

by 레옹


서귀포의 저녁 햇살이 막 내려앉을 무렵, 올레 스테이 1층 로비는 따뜻한 환영의 공기로 가득했다. 올레 센터장과 매니저, 스태프들이 입구에서 이름표와 프로그램 팜플릿을 건네며 “올레 힐링 캠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며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귤차의 산뜻한 향이 로비를 은은히 채우고 있었다.


태호는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객실에 올려두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 사이 주차를 마친 연경은 참여자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가볍게 미소를 건네고 있었다. 둥글게 배치된 의자에 사람들이 하나둘 앉자, 매니저가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오늘은 서로를 짧게 소개한 뒤, 새섬으로 저녁노을 산책을 갈 예정입니다.”


짧은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연경은 차례가 오자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저는… 제주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이런 프로그램은 처음이에요. 혼자선 용기가 안 났는데, 오늘은… 함께라서 용기를 냈습니다.”


잔잔한 웃음과 고개 끄덕임이 더해졌다.

태호는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게 한 한 사람을, 더 늦기 전에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말이 로비의 정적 속에 진심을 얹은 파동으로 퍼져 나갔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연경은 그의 말에 붙들린 듯 예쁜 눈매로 태호의 얼굴에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해가 지평선으로 천천히 미끄러질 때, 참가자들은 새섬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어깨에 얹혔지만, 바다에서 밀려오는 제주의 바람이 땀을 식히며 길 위의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 주었다. 발밑으로 파도 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오고, 난간 너머 바람이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스태프가 건넨 어멍샌드위치가 손에 쥐어졌다. 연경이 빵을 반으로 갈라 태호에게 내밀었다.

“같이 먹어요 우리.”

“네, 고마워요.”


대화는 짧았지만, 빵을 나누는 그 작은 동작이 둘 사이에 조용한 리듬을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옆사람과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도 이내 각자의 사유로 걸음을 옮겼다. 찬란한 금빛과 붉은색이 녹아든 노을이 바다 위를 천천히 건너는 동안, 태호와 연경은 말없이 같은 보폭을 맞췄다.


연경은 가끔 고개를 들어 태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스치는 눈길이 도망치지 않고 한 번 더 머물렀다. 태호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바람, 파도, 발소리.

그 모든 소리 위로 서로를 향해 천천히 열리는 마음의 문을 새섬의 자연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연경 씨. 함께해 줘서…”

“제가 고맙죠. 태호 씨랑 이렇게 힐링할 수 있어서요.”


노을은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고, 두 사람의 감각은 그 색을 지긋이 바라보며 몸에 아니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연경이 돌아간 뒤, 태호는 루프탑을 찾았다. 밤하늘을 포옹하듯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가벼우면서 첫사랑처럼 반응하는 심장을 얼마 만에 느끼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제주의 바람과 별빛을 안고 서 있었다.


이튿날 아침 전날보다 더 화사한 웃음을 품은 연경이 올레스테이를 다시 찾았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버스가 곶자왈 숲 앞에 멈춰 섰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축축한 흙냄새, 이끼 낀 바위에 맺힌 물방울들,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바닥에 잘게 흔들렸다.


“잠시 말을 멈추고, 숲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작은 키에 안경을 쓴 센터장의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새소리, 바람, 흙을 밟는 발자국 소리… 태호는 문득 깨달았다. 곁에서 들려오는 연경의 발소리와 고른 호흡이 숲의 어느 소리보다 더 또렷하다는 것을. 좁은 길에서 사람들과 엇갈리며 몸을 비킬 때 그의 팔이 연경의 어깨를 스쳤다. 연경은 태호의 눈빛과 마주치자 미소 한 조각을 남겼다.


태호는 대답 대신 숨을 고르며 걸음을 맞춰 걸었다.

‘고요는 비어 있지 않다. 그 안에 그녀가 있다.’


연경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을 바라보다가 다시 태호의 눈을 찾았다. 도망치지 않는 눈빛이 이번에는 한 박자 더 머물렀다. 그늘 아래 잠시 쉬는 동안, 참가자들은 울창한 숲 사이로 흘러드는 빛을 눈에 담았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평안한 모습들이었다.


점심 무렵, 1층 복합공간에 임시 키친이 꾸려졌다. 방금 씻어낸 상추와 방울토마토, 자리젓과 자리젓장, 제주 올리브유와 통소금… 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조별로 요리를 시작하자 태호는 칼끝을 세우다 멈칫했다.


“아… 이게 잘 안 되네요.”


연경이 다가와 그의 손등을 가볍게 감싸 쥐며 칼 각도를 바로잡았다.

“이렇게 잡으셔야 안전해요.”


짧은 순간 손끝에 스민 온기가 태호의 심장으로 전해졌다. 칼질이 차분해지자 연경은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긴장을 풀어 주방의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이어서 간세 인형 만들기. 바느질이 서툰 태호의 실타래가 엉켜 길게 늘어졌다.

“이건… 인형이 아니라 미역줄기 같은데요?”

“자, 그 미역줄기를 인형으로 탈바꿈시켜 봅시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연경도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둘 사이를 조금씩 더 끌어당겼다.


‘오늘 내가 들은 가장 따뜻한 음악은… 그녀의 웃음이다.’

태호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해가 기울 무렵, 작은 사찰의 다실에 둘러앉았다. 오래된 나무 향이 스민 방, 낮은 탁자와 방석, 손마다 들려 있는 따뜻한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천천히 공기를 덮었다.


연경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향을 들이켰다. 태호는 차향 너머로 그녀의 숨결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


명상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나란히 눈을 감았다. 하나, 둘—호흡의 길이가 서서히 맞아 들어갈 즈음, 사찰의 풀벌레 소리는 멀어지고 내면의 숨소리만이 가까워졌다.


연경이 아주 낮게 속삭였다.

“조용한데도… 마음은 움직이네요.”


태호는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그 마음을 따라가 보세요. 천천히…”


그리고 그의 마음속엔 한 문장이 또렷이 떠올랐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고요가 이렇게 충만할 수 있구나.’


차향이 가라앉은 저녁, 말도 설명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그의 호흡과 그녀의 호흡이, 같은 리듬으로 여행하고 있었다.


사찰을 떠나는 그들 옆에 다가온 센터장이 두 사람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문장을 흘리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길이 사람을 데려다줍니다. 서로에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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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처음 본 순간 / 레옹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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