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소설 – 오래된 첫날》

처음인데 낯설지 않은, 첫 만남

by 레옹


입국장 자동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캐리어 구르는 소리와 안내 방송이 뒤섞였다.
태호는 사람들 틈에서 잠시 멈춰 서서,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 사이로 시선을 흘렸다.

휴대폰을 두 손에 꼭 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고, 커다란 눈빛이 곧장 그를 붙잡았다.

“태호 씨… 맞죠?”


9년 동안 화면 속 글자로만 불리던 이름이 공기를 가르며 태호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태호는 여행자가 아니라 시간을 건너온 사람 같았다.

“네, 연경 씨. … 생각보다 가까이 있네요.”


둘은 어색하게 웃으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농담처럼 침묵이 먼저 길을 열었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들은 궁금해했을까...

자동문이 닫히는 순간 후덥지근한 공기가 코 끝과 피부에 와닿는다.
에어컨 냉기 대신, 약간의 습기 섞인 제주의 바람과 바다내음이 확연히 느껴졌다.

쉼호흡을 하는 태호를 향해 연경이 살짝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게… 제주 냄새예요. 공항 안에서는 못 느끼셨죠?”


태호는 가방 끈을 고쳐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야… 진짜 도착한 것 같네요.”


연경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화면 속보다… 말이 느리시네요.”


태호도 피식 웃으며 맞받아쳤다.
“아마… 자막이 없어서 그럴 거예요.”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색함이 풀리자, 9년의 간격이 조금은 좁혀지는 듯했다.


연경의 차가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사이드미러 너머 활주로 끝에 서 있는 비행기 꼬리들이 작아지고, 곧 드넓은 제주 바다가 나타났다.

“서귀포까지는 애월 쪽 해안도로로 돌아갈까 해요.”


연경이 방향등을 켜며 말했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길을 잘 기억해 둬야겠어요. 연경 씨와 지나는 첫 길이니까요.”


“요즘은 카페촌으로 유명해졌죠.
관광객들은 카페마다 줄 서 있는데, 사실은 바람을 맞으며 걷기만 해도 좋거든요.”


창밖에는 감귤 노점과 카페들이 드문드문 이어졌고, 현무암 돌담은 바람을 흘려보내며 검게 빛났다.
멀리 한라산 능선이 구름에 가려 절반쯤 보였다.

“저기 보이는 오름이 새별오름이에요. 가을엔 억새로 덮여서 장관이에요.”


연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태호는 창문을 반쯤 내리고 바람을 맞았다.
습기 섞인 공기가 금세 차 안으로 들어왔다.

“서울 공기랑은 확실히 다르네요.”


“다르죠? 저는 이 냄새가 익숙해서, 오히려 도시에 가면 숨이 막혀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라디오에서 낯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노랫말이 둘 사이를 채우듯 번져갔다.

‘이건 시작이 아니야, 오래된 첫날 같았어~’


태호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웃었다.
“이 노래, 딱 지금 같네요. 처음인데…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연경도 운전대를 잡은 손끝에 힘을 살짝 주며 대답했다.
“… 저도요. 오래 알던 사람이 옆에 다시 앉은 것 같아요.”


차가 해안도로를 벗어나 잠시 멈췄다.
연경이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잠깐 내려보실래요? 제가 좋아하는 해변이에요.”


태호는 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

연경이 먼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여기 모래사장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아봤거든요.”


담담한 말 한 줄이 바람보다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태호는 잠시 시선을 모래사장에 두었다.
파도는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는 듯했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다시 오고 싶으셨군요.”


연경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바다를 바라봤다.
“네. 그래서인지, 태호 씨와 함께 올 땐 꼭 여기를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


연경이 샌들을 벗으며 말했다.
“여긴 그냥 보기만 하면 섭섭해요. 발이라도 담가야 진짜 제주죠.”

하늘하늘한 옅은 하늘빛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태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차갑고 투명한 바닷물이 발목 위로 찰랑거리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생각보다… 시리네요.”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아요.”


연경이 발끝으로 장난스럽게 물을 튀겼다.
파도에 반짝이는 물방울이 튀어 태호의 바지 끝을 적셨다.

“이거 제주식 인사인 거죠?”


태호가 웃자, 연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바다 대신 장난친 거예요.”


태호도 발끝을 움직이다가, 예상보다 크게 튀어버린 물방울이 연경의 원피스에 닿았다.
“어머~ 제주식 인사를 금세 배우시네요.” 그녀가 웃으며 외쳤다.


그 순간, 갑자기 세찬 파도가 밀려왔다.
모래가 꺼지듯 발밑이 흔들리자 연경이 휘청거렸고,
태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짧은 순간, 손과 팔이 맞닿았다.
파도 소리만 크게 들리고, 말은 끊겼다.


연경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작게 속삭였다.
“… 잡아줘서 고마워요.”


태호는 아직 손끝에 남은 온기를 느끼며 대답했다.
“아직은… 제가 넘어질 차례가 아닌가 봐요.”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발목까지 젖은 채, 바닷물을 털며 모래사장을 나란히 걸어 나왔다.

해변 길에 들어서자 태양빛이 강하게 내려앉았다.
연경이 차에서 양산을 꺼내며 말했다.
“여긴 그늘이 없어요. 오래 걷다 보면 금방 지치거든요.”


태호가 손을 내밀며 양산을 건네받았다.
“제가 들게요.”

양산이 그의 손에서 펼쳐지고, 둘은 자연스럽게 작은 그늘 아래 나란히 걸었다.
햇살은 가렸지만, 대신 서로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어깨가 스칠 듯한 거리였다.

파도 소리가 현무암에 부딪혀 리듬을 만들고, 그 속에서 대화가 시작됐다.

“아까 말씀하신 장한철, 어떤 사람이에요?”


태호가 물었다.

연경이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조선 후기 문인인데, 제주에서 태어나 일본 앞바다를 표류했다가 돌아와서 그 기록을 남겼죠.
그의 글에는 파도 소리, 바람 냄새 같은 게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그럼, 이 길은 그 기록을 따라 만든 거군요.”


“네. 파도와 갈매기 소리는 늘 사라지지만, 글로 남기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아요.
마치… 우리가 오늘 걷는 이 길도 누군가의 글이 된다면, 또 오래 남겠죠.”


짧은 바람이 불어와 양산 아래 공기를 흔들었다.
태호는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연경의 숨결이 미묘하게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제주의 후덥지근한 바람보다 더 오래 머무는 감각이었다.

그 순간, 좁은 길에서 마주 오는 행인과 비켜서려다 양산이 살짝 기울며 두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
태호가 머쓱하게 웃었다.
“길이 좁아서...”


연경이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네, 좁아야… 가까워질 수 있죠.”

연경의 큰 눈이 웃음 지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 끝에 닿자 애월 카페거리가 펼쳐졌다.
큰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시원한 음료를 주문했다.
잔에 맺힌 물방울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대화는 자연스레 멈췄다.


짧은 눈 맞춤, 곧 서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마주쳤다.

연경의 눈빛에는 질문이 들어 있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


태호는 눈으로 대답했다.
‘익숙한데 낯설고, 낯선데 오래된 기분이에요.’


바람이 창밖 야자수 잎을 흔들고,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이 또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린다.
그 모든 소리가 두 사람의 눈빛 사이에서 번역되고 있는 언어 같았다.

연경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계속 봐도 괜찮아요.”


심장의 두근거림이 카페 음악과 섞여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태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말보다 오래 머무는 침묵이, 그들의 첫날을 문장처럼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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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첫날 / 레옹 작사



처음 본 날

창가에 앉아 웃던 너

그 눈빛이 내게 스며들었지

말 한마디 없이 시간이 멈추고

계속 봐도 괜찮았던 순간


이건 시작이 아니야

오래된 첫날 같았어

처음 본 순간 이미 너와 난

알고 있었던 거야


시간 저편에 숨겨둔 듯

네 목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와

거리를 넘어 세월을 넘어

너와 난 이미 이어져 있었어


이건 시작이 아니야

오래된 첫날 같았어

처음 본 순간 이미 너와 난

알고 있었던 거야


우연이란 이름의 운명

별빛 속에 숨겨진 긴 여정

모든 게 날 이끌었어

네게 닿기 위해서


이건 시작이 아니야

오래된 첫날 같았어

처음 본 순간 이미 너와 난

알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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