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을 사랑해 줘!
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대학을 갔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져 있을까
많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후회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난 11월 난 드디어 고향을 떠났다
지긋지긋한 쪽빛하늘이 내 마음 같아서 지금도 고향엔 잘 가지 않는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도시가 좋았다
그 틈에 나를 감추는 것도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는 것도 좋았다
쪽빛하늘에서 잿빛하늘로 바뀌었듯 나의 존재감은 커다란 형체에서 내 모든 에너지를 응축시킨 점 하나가 되었다
내가 살고 있던 지방의 가장 큰 도시로 나왔다
자격증 취득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와 졸업식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자격증 공부는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길가에 깡통을 걷어차듯 저 멀리 차 버렸다
계획은 없었다
잿빛하늘 아래서 스스로 생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시골서 몇몇 비진학그룹의 친구, 동창들과 함께 왔으나 한 달안에 제각각의 진로를 결정했다
학원에서 소개해준 공단의 공돌이 생활은 첫 월급을 받고 바로 뛰쳐나왔다
학원장은 학생 한 명당 얼마의 커미션을 먹었으리라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은 지역의 조폭이 마누라에게 운영권을 맞긴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었다
주방에 지질한 30 중반의 노총각인 주방장이 있었고 50대 주방 보조 아주머니 그리고 설거지 담당 할머니 홀엔 지배인이라기엔 좀 그렇고 농땡이 전문 투잡 뛰는 20대 중반 조폭 똘마니(밤엔 스탠드바 지배인을 겸했음)
나, 여자 써빙 한 명, 카운터 직원 이렇게 한솥밥을 먹고 있었다
조폭 마누라 사장님은 어쩌다 한 번 가게에 나와 실내를 휙~ 둘러보다 들어가는 게 일과였다
장사가 잘 되는 곳도 아니다
규모로 보나 인테리어를 생각하면 종일 붐벼야 마땅한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무료한 생활이 지속됐다
가게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지역 유선방송을 송출했었는데 그 당시 유선방송 채널이 3개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가게는 팝을 주로 틀어주는 채널을 자주 이용했는데 이게 전화로 신청곡을 이야기하면 틀어주는 서비스가 있지 뭔가?
그때 내가 자주 신청하던 음악이 있었는데 원래 아는 노래는 아녔고 가게에 자주 오는 어느 키다리 아가씨의 신청곡이었다
그 아가씨와는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기도 한다
내가 그 노래를 하루에 몇 번씩도 신청을 했었는데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니? 무슨 똑같은 노래를 매일, 그것도 몇 번씩 신청하고 그래요?"였다
그 노래는 'Rockwell - Knife'였다
https://youtu.be/Hi_9GrQhLgk?si=wv8Z87sMiHpc4ldu
어느 한가한 오후였다
그 키다리가 혼자 와서 쏘야에 생맥주를 두 잔 시킨다
'아니, 혼자 와서 왠 두 잔?'
오늘은 신청곡을 받지 않았다
내가 미리 신청했으니까...
그녀가 나를 부른다
"네 손님"
"앞에 앉아요"
"안 됩니다 영업시간에 손님 테이블에 앉을 수 없어요"
"그래요?"
"네"
"그럼, 비번이 언제예요?"
"낼모레요~"
"그럼 그날은 같이 앉을 수 있는 거죠?"
"저랑 앉고 싶습니까?"
"네~ 얘기하고 싶어요"
'아니 아무리 안면은 있다 하나 갑자기 웬 얘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잿빛하늘아래 잿빛스타일의 화장을 한 그녀가 나랑 얘기가 하고 싶다니...
당최 여자들을 모르겠다
"언제 끝나요?"
"왜요?"
"가능하면 오늘 얘기하고 싶어서요"
"무슨... 얘길요?"
"그건 둘이 마주 앉아서 얘기할게요"
궁금해졌다
아무리 단골이라지만 갑자기 웨이터에게 할 얘기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스탠드바에 가있는 지배인에게 전화를 했다
장사도 안되고 한가했으므로 조기 퇴근을 허락받았다
"앉아도 될까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키다리 아가씨!
"Of course!"
반달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녀 (귀여운 구석이 있네)
"김 빠진 맥주 새로 바꿀까요 아님 장소를 바꿀까요?"
"안주가 그대로니 일단 맥주를 새로 가져올게요"
"Thanks you!"
한쪽눈을 찡긋하는 그녀!
"몇 살이에요?"
"22살요"
나이를 올려 얘기했다
20살은 왠지 어리고, 만만하고, 우습게 비칠 수 있으니 한두 살 올려 말하는 건 당연지사다
"그쪽은요?"
"동갑이네요 우리 친구 해요"
"이렇게 빨리?"
"우리 얼굴 튼 지는 몇 달 됐잖아 쌩판 첨 보는 사이도 아닌데 뭐"
"응? 그래~"
"난 00이야 넌?"
"난 '건터'라고 해"
.
.
.
"니가 맘에 들어"
"응? 내 어디가?"
"음~ 입술! 키스를 부르는 입술 같아~"
그녀는 그 가게의 단골이었고 직업은 화류계 프리랜서였다
키가 170이 넘는 롱다리에 단발머리였는데 성격은 쾌활했으며 어려선 선생님을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잦은 가정폭력과 노름으로 큰 빚을 지고 어머니는 중학생 때 가출했단다
당구 유망주였던(그때 당구 250이었음, 난 150) 00 이를 결국 집 밖으로 내 몰았고, 장녀였던 그녀는 집에서 먼 도시로 나와 아버지 대신에 집안에 생활비를 대는 실질적 가장이었다
당구장엘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친구 놈 중 당구 좀 친다는 놈을 데려갔는데 그녀에게 *박살 났다
쭉뻗은 롱다리와 큐대는 그녀에게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우린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 당시 난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가 홀로 방을 얻어 독립해 있던 터라 그녀는 수시로 내 방에 들락거렸다
그렇다
그녀는 나의 성인식을 치러준 나의 첫 상대였다
'첫 키스' 보다 농도가 진하니 이번엔 굳이 글로 표현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녀가 내게 했던 몇 마디는 글로 남겨야 할 것 같다
"너 첨이구나?"
"아니거든~"
발가벗은 몸보다 '첨이구나' 그 한마디가 더 나를 부끄럽게 했다
"강한 부정은..."
"섹*를 말로 하냐?"
"여자는..."
"꽃처럼 다뤄야 하지"
"오~ 맘에 들었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냐"
"..."
"진심으로 사랑해 줘야 해"
"여기까지 하자"
하룻밤 만리장성에 사랑을 전제한다니 자신감이 사그라진다
"노노~ 지금 이 순간을 진심으로 사랑해 달란 얘기라고 바보야~"
"…"
"나 맘에 드는 곳 어디야?"
"키"
우리의 심장은 서로 공명해 갔다
그렇게 난 진정한 성인의식을 치렀다
진심(?)이 담긴 애정을 주고받으며...
(그 순간에 '둘리'는 없었다 '둘리'를 닮은 여자가 있었다)
변명 같지만 육체적 성인식을 진정한 성인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학창 시절에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는 '둘리'에 대한 애착이 더 컸으므로 몇 번의 프러포즈도 모두 거절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네 친구의 친누나가 고등학생 형들에게 집단으로 강간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이 없었더라면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을 거다
나의 중고등학교 연애사는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다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딱히 없다
심장이 사랑했다
첫사랑은 짝사랑이었다
외사랑은 행복하지 않았다
레옹의 외사랑은 계속 이어집니다
PS : 나의 첫 그녀! 당구녀는 내게 동거를 제안했으나 난 그 도시를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이별을 하게 됩니다(조폭 사장은 '범죄와의 전쟁'으로 구속되고, 조폭 마누라는 가게를 정리하고 친정이 있는 도시로 되돌아갔다)
만약에 그 도시를 떠나지 않고 그녀와 동거를 했더라면?
'둘리'는 중학교를 졸업 후 고향에서 버스로 300km 떨어진 낯선 도시의 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합니다
굳이 딸을 그 먼데까지 보내야 했을까?
'건터'는 '둘리'를 찾아갑니다
'Knife'는 미국의 가수 'Rockwell'이 1984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Rockwell'은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 음악 레이블인 'Motown Record'의 설립자의 아들로 '마이클 잭슨'과 너무도 친한 1980년대 가수입니다
1집 앨범에 '마이클 잭슨'이 게스트로 참여하여 백 코러스를 했는데, 빌 보드 R&B 차트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건터'가 이 노래를 알고 나서 몇 년 후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 ost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