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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별과 등대 Jul 27. 2020

가을

1. 가을이 오면


(부제: 여행도 가기 전에)

 창으로 들어온 햇빛에 이상하게 눈이 따가웠다. 분명 시간이 이른 아침은 아니라는 걸 짐 작게 했다. 이건 지각의 신호다. 아니나 다를까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망했다. 알람이 왜 안 울렸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 날인데 엉망이 되었다. 친구들과 기차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에 늦었다. 헐레벌떡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머리도 대충 묶고 옷도 손에 들고 신발도 구겨 신고 달리기 시작했다.
잘못 채워진 셔츠 단추를 다시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거리에 시한폭탄이 널려 있었다. 노란 껍질 속에 막강한 고분자의 필살기를 장착한 가을의 대변 향 ‘은행’이었다. 실수로 밟기라도 하면 종일 그 냄새가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닌다. 다행히 미리 발견해 조심하며 현란한 발놀림으로 요리조리 피했다.
 미리 불러 놓은 택시를 기다리면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기분이 상쾌했다.
  “빵빵.”
클랙슨 소리에 돌아보니 택시가 도착했다. 문을 열려고 마지막 발을 내딛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나 하고 신발 바닥을 보니 역시나 은행을 밟았다. 새로 산 신발을 처음 신자마자 은행을 밟다니 분명 불길한 징조였다. 대충 털고 닦으려는데 차가 출발했다.창문을 열고 얼마나 달렸을까.
 “요즘 은행 냄새가 많이 나죠?”
밖에서 냄새가 들어오는 줄 알고 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닫았다. 동시에 빠지지 못한 특유의 구린내가 차 안에 가득했다.
 “아이고, 창문을 닫아도 냄새가 안 빠지네.”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더 숨길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아까 타기 직전에 제가 은행을 밟았는데 처리를 못 했어요.”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위로했다.
 “아이고, 아가씨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 은행 밟으면 3년 재수가 좋아진 대. 나도 오늘 아침에 밟았거든. 우리 둘 다 재수 좋은 사람들이네.”
마음이 편해졌다. 말 한마디가 주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는데 기분 좋게 만드는 말의 힘이 새삼 느껴졌다. 목적지에 도착해 내리면서도 가슴이 훈훈했다.
 기다리는 친구들에게 뛰어가 사과를 했는데 늦어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 같이 신으려고 맞춘 신발에 전부 은행 도장이 찍혀 있었다. 서 있는 자리에 퍼지던 냄새 때문에 서로 코를 막고 한참 웃었다. 결국 우리는 여행 내내 삼선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부제: 길을 잃은 자리에서부터 진짜 모험이 시작될 거야.)

 코스모스 향기가 산들산들 발걸음을 유혹한다. 눈이 시린 하늘 맑은 공기가 여행을 가기에는 딱 맞는 계절이다. 5박 6일의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하고 짐을 쌌는데 무거워진 가방의 무게와 설렘의 무게가 비슷했다.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말이 딱 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서울에서 2일, 대전에서 1일, 부산에서 1일. 더 이동해야 하는데 지쳐버렸다. 주머니 사정도 빤했지만 낑낑대며 짐가방을 들고 다니는 일이 여간 지치는 게 아니었다. 결국 여행을 포기하고 집 가는 기차를 탔다.
홀로 떠난 여행에서 보람과 깨달음을 얻고 싶었는데 힘듦과 고생을 얻었고 추가로 다리에 쥐까지 선물 받았다. 이어폰을 꽂아 잔잔한 음악을 틀고 심신을 진정시키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곳은 어딘지는 몰라도 어둠이 내려앉은 밤인 건 분명했다. 어느 역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서둘러 내렸다.
 허름한 역을 나와 보니 낯선 시골 마을이었다. 인적은 없고 어둡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감각을 잃어 무서웠다. 하룻밤 잘 곳을 찾으러 걸어가는데 조금씩 보이는 건물은 불빛이 없고 건너는 사람이 없는 신호등만 부지런히 일했다.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는 24시 편의점이 있다는 불변의 법칙을 믿으며 살폈더니 진짜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친절히 숙박업소를 알려줘 피곤함에 지친 몸을 쉴 수 있었다. 라면을 먹다 잠이 들었는지 다 먹고 잠이 들었는지 하여튼 깊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낮이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동네의 풍경은 원래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서둘러 준비하고 밖을 나왔다. 군데군데 단풍이 든 나무들 사이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향기를 뿜고 있었다. 산책 나온 동네 분들의 사투리는 구수했고 엄마의 손을 잡고 걷다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려 우는 아이는 귀여웠다. 작은 정자에 모여 장기 한판에 막걸리 내기가 한창인 할아버지들의 걸걸한 웃음소리와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하는 풋풋한 커플의 눈 맞춤이 사랑스러웠다. 이 모든 걸 감싸 안은 오래된 기찻길 풍경이 가을 하늘과 어울려 완벽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을은 여기에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길을 잃은 자리에서부터 진짜 모험의 시작’이라는 문장을 봤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예상치 못했던 여행을 한 그날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얻게 된 행운이었다. 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하늘이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모험하기 더할 나위 없다. 이번엔 계획 없는 여행을 해보자.
또 어떤 행운을 만날까?






(부제: 부석사의 가을)

 가을을 찾아 나선 길은 바람난 처녀의 분홍빛 설렘처럼 가슴을 물들였다. 스쳐 가는 바람 한 점도 따스하게 다가오는 계절의 유혹은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일탈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단 무작정 가보는 거다. 우리가 언제 계획하고 움직였더냐. 바람 가는대로 물 흐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저지르는 거지.’ 출발한 차에 올라탄 이상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다는 지론을 내세우며 무계획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도로 위의 여행객이 되었다.
 시간이 되면 언제 한 번은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부석사’를 떠올리는 찰나의 시간이 깊은 종소리로 메아리쳤다. 그곳에 가면 왠지 잃어버린 첫사랑을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련한 그리움 한 덩이를 안고 있는 마음에 불현듯 생기는 추억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은 짙은 심장이었다.  스쳐 지나는 풍경들에 녹아있는 자잘한 가을 이야기는 은행잎의 조잘거림보다 즐겁고 단풍이 주는 고움은 솜사탕보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낯선 길에서 만나는 시간의 여유가 주는 따스함은 엷게 물든 새색시의 뺨보다 붉다. 많은 여행지를 뒤로하고 부석사를 택한 마음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가슴 시린 사랑이 오롯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자리한 ‘부석사’는 의상대사와 선묘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 설화로 유명하다.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가서 공부했던 하숙집 아가씨가 바로 선묘였다. 선묘는 의상대사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 자신을 받아 달라 청했지만 이미 중이 되기로 한 대사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는 배에 대사가 탔다는 얘기를 들은 선묘는 바다에 빠져 생명을 끊었고 그 후 용이 되어 대사를 신라까지 무사히 모셨다고 한다. 신라에 온 의상대사가 봉황산 중턱에 절을 중수하려 했지만, 그곳에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달갑지 않게 여겨 목숨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때 사방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매섭더니 큰 바위 하나가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이 땅은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니니 물러나라. 물러나라.’였다.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달아난 후 바위는 산 중턱에 내려앉았는데 선묘가 석신이 되어 대사를 도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 바위는 억겁의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있다. 이 연고로 절 이름이 뜬 바위라는 ‘부석사’가 된 것이다. 죽어서도 사랑을 지켰던 선묘는 ‘선묘각’이란 사당으로 흔적을 남겼고 대사와 이루지 못한 애틋한 정은 늙지 않는 꽃잎이 되어 하늘하늘 떠다녔다. 아름답다. 분홍빛 연정이 눈물겹도록 곱다.
 사람이 무작정 좋아 그저 가슴만 설렜던 철부지 시절에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첫사랑이 된 사람.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손을 잡고 밥을 먹는 일이 어색하지 않고 기다려졌던 시간 속에 당신이 있다. 처음이라는 말이 가진 신비함은 누구의 기억 속에나 금방 떠오르는 하나쯤의 비밀이 있다는 거다.
첫눈, 첫 키스, 첫사랑, 첫돌, 첫 입학, 첫 여행, 첫 이, 첫술 같은.
그와 함께한 첫사랑의 첫 여행지는 ‘부석사’였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깨소금처럼 좋았다고 할까! 절을 둘러보며 나눴던 달콤한 이야기들이 풀잎마다 햇살 알갱이로 숨어있다 튀어나왔다. 세월이 그리 흘렀건만 어쩌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살아남아 잘 왔다고 등을 토닥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땀이 가득한 손바닥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사랑한다던 모습이. 참 어렸고 순수했고 물정을 몰랐다. 그저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던 겁 없는 이십 대였다. 다시 돌아간다면 달라질까.
 의상대사와 선묘의 사랑처럼 우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위가 떠 있다는 곳에 왔으니 사랑도 떠버렸다고 위안으로 삼으려 해도 살면서 문득 마음이 질문을 던진다. 세월의 때가 묻어 순수와는 거리가 먼 아줌마로 온종일 김치 냄새 풀풀 나는 머리에 아이들이 입다 버리려는 낡은 티셔츠를 입고 시장에서 콩나물 덤을 외치는 억순이로 변한 나에게 사랑의 틈이 남아있냐고 말이다. 울컥 미치도록 삶이 힘들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날에 그나마 위안을 받는 건 나에게도 가슴 시린 첫사랑의 기억이 있음을 남들은 모른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가을에 취한 하늘은 온통 쪽빛이다. 흐느적거리는 바람이 법당 안을 휘감으면 ‘부석사’는 가을이 된다. 선묘가 된다. 큰 바위가 된다. 봉황은 오로지 벽오동의 열매만 먹는다고 했던가. 길가에 오동나무가 봉황을 기다린다. 아무리 힘들어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는다는 봉황을 품에 안은 ‘봉황산’의 부석사는 사람들의 흔한 발걸음에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고즈넉하다.
찾아오는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는 덤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지는 오후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난 여기는 새로운 계절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다스럽게 내 얘기를 물어보지 않고 내민 약수 한잔에 막혔던 시름이 뻥 뚫리는 이상한 곳이다.
많은 절을 가보고 산과 바다를 다녔지만, 오늘처럼 상쾌하고 새록새록 가슴이 뜨거웠던 기억이 없다.
가고 오지 않았으니 흔적이 없고 내려놓고 올리지 않았으니 무게가 없고 비우지도 채우지도 않았으니 형체가 없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다. 떠나지 않았으니 돌아오지 않는 현실이 여행이다.
잘 왔다. 이만하면 족하다.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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