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세상 모든 리키들
누구도 하지 않아서 일까? 감독이 우리를 대신해 한 가족의 삶을 팍팍하고 고단하고 피폐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적 시스템을 미안해한다. 잔잔하지만 신랄하게 지적한다. 그게 많이 아프다.
수입은 적지만 그 안에서 행복하고 단란했던 리키(크리스 히친)의 가족은 리키의 실직으로부터 일순간에 변한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한 현실처럼 영화는 암전에서 시작한다. 이유가 어쨌든 지랄맞은 상사에게 대든 죄로 자영업자의 길로 접어든다.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야"
일주일에 6일, 하루 14시간을 일해야 하는 자영업자. 돈을 번다기보다 벌점과 폭행과 조롱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며, 자영업자이면서 잘릴 것을 걱정해야 하는 구조적 시스템에서 리키는 얻는 것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잃는다. 그것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
영화를 보면서 딱히 서러움 포인트도 없이 이렇게 많이 그리고 오래 울린 영화가 있었을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제도와 기득권자들로부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오히려 그보다 더 처절하다.
기득권자인 고용주는 등장도 하지 않고 하청업자와 재하청 업자의 노예적 시스템을 보여주면서 벌점을 피하고 단말기 대여료 폭탄을 피하기 싫다면 그저 인간적 관계는 주머니 속에 넣어두라고 일침을 가한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아'라는 고용주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은 노동자가 있을까.
여기에 감독은 질문한다. '가족은 무슨 의미인가?' 혈연으로 묶여 있으되 그때그때 감정과 피로도에 따라 함부로 해도 다 이해해야 하며, 가장의 무능력함을 절대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위해 강해져야 하는 존재인가? 그리고 행복은 1천 달러짜리 밴과 6개월을 죽도록 일해 내 집이 생기면 부록처럼 딸려 오는 것인가?
감독의 마법 같은 편집은 딱히 감정을 끌어올리거나 관객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아도 될 만큼 고군분투하는 리키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게 만든다. 성실하게 삶에 최선을 다하는 리키와 애비(데비 허니우드)의 모습에서 부모의 삶은 자식들의 나은 삶에 저당잡히는 일이 과연 누굴 위한 노력인지 되묻는다.
또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예약을 해도 얼굴 한번 마주할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일해야 하는 부모의 책임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고 자신이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여자친구와 이별한 후 마음은 어떤지에 대해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만, 새브(리스 스톤)가 그린 그래비티처럼 이미 팍팍해진 삶은 가족 간에 서로 알 수 없는 말만 쏟아내고 듣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결국 감독조차 이렇다 결론을 내려줄 수 없는 이 오묘한 철학적 질문은 먹먹하고 답답하기만 한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어쨌거나 인생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확실하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리키가 굳이 차를 돌리길 바라는 이유는 내가 그러고 싶어서다. 하지만 밥줄을 포기하고 핸들을 돌릴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영화가 끝나고 리키가 시작하는 그러니까 깜깜한 상황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실업수당이 아닌 벤을 선택하는 순간이 곧 생명을 다해 가는 전구처럼 깜빡였다. 리키는 실업수당이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 아닌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노동의 대가이고 그 대가를 받으며 좀 더 나은 일을 찾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될 순 없었을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실업 수당을 받기 위해선 시스템 앞에선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일깨워서일까 리키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실업 수당을 포기하는 장면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노동이란, 돈 몇 푼에 자존감을 저당 잡혀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함을 우린 애비의 분노를 통해 우리 모두는 세계 모든 리키들에게 미안함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대의 리키들이 안타까운 이유는 성실하게 그러면서 죽을힘을 다해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지지 않는 삶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게 그뿐이라서다. 그리고 이 시대의 리키들이 슬픈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처럼 된다는 말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해야 하는 일이며 심지어 자신처럼 살면 불행하다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음이 입안에 가득 찬 이물감처럼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리키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