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다 끝난 상징, 계획은 무슨.
한참 주가를 올릴 때도 보지 않았다. 봉준호를 그의 페르소나라는 송강호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였다. 또 살짝 상 받은 것들에 대한 거부감도 좀 있고. 너무 구태의연한 핑계다. 그러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좀 불편한 영화라고 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서 은근 신경 쓰였다. 그러다 봤다. 근데 뭐가? 그들은 어떤 점이 불편했을까. 도대체.
시작부터 놀랍다고 해야 하나? 4인 가족이 반지하에서 사는 거야 그럴 수 있다. 13층 아파트에서도 바퀴벌레랑 같이 사는 집도 있으니 산다는 면에서 뭐가 문제랴. 한데 식구 중 누구도 온전한 경제활동을 안 하고, 비번이 걸린 와이파이를 간단하게 포기하고 다른 채널을 찾아 쿨하게 화장실 안에서도 남매는 짜증도 안 낸다. 이게 어이없다. 대부분 이렇게 피곤하고 배고픈 상황이면 아귀다툼이 정상일지 모르지 않겠냐 싶다.
반지하든 깊숙한 비밀 가득한 지하든 살만한 곳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누굴까? 1/4의 불량을 만들어내는 일에도 주눅 들지 않고 경제적 수단이나 그 밖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가장의 탈 계획론은 씁쓸함을 넘어선다. 그들의 가훈이 왜 안빈지족인지 명확해진다.
제목부터 꽤나 상징적인 것들이 많다. 내가 뭘 알겠냐마는 이래저래 자꾸 신경 쓰이던 것들이 있다. 사실 영화만 보지 않은 게 아니라 정보도 거의 들을 게 없는지라 오지랖이거나 황당무계인 말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시작부터 돌을 돈으로 대치 시키는 치환술을 보여주고 기생충이 인간의 것을 탐하는 욕망을 적당히 찍어 누르기도 하고 결국 인간이 되려 애쓰는 찰나 머리를 찍는다.
선을 넘어오지 않는 인디언 추장의 권위와 그 선이 어딘지 잘 모르는 우매 몽매한 기생충의 현실적 처세는 결국 자신보다 더 우매한 추장의 아내에게로 집중한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것을 탐하는 순간, 해도 안 되는 일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때 삶의 형편이 나아지는 현실을 자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나마 열심히 살아 볼 의지를 잠시 다진다. 그게 사기임을 알지만 그저 계획일 뿐이라고.
사람이 좋아서 부자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부자니까 사람이 좋아 보이는 것인지, 사실 며느리도 모를 일이지만 신분이 계급처럼 존재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동익(이선균)의 말처럼 선을 지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할지도 모른다. 운전을 해야 하는 신분으로 사랑을 논하거나 욕을 먹어야 할 신분이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찰진 욕을 씨불이면 그건 분명 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기택(송강호)의 냄새는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냄새가 깊숙한 비밀 가득한 지하에서 올라온 근세(박명훈)에게서 애매하던 기택의 냄새가 강렬하게 동익의 코를 자극했을지도.
대부분 사회고발적 불평등의 이야기에는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하는 노동자가 분노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대부분 노동자인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거다. 그런데 이 영화는 불평등에 쪄들어 그런 궁핍한 삶을 이미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시스템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놈의 카스테라는 돈 좀 벌어 보겠다는 두 놈이나 지하로 내몰았다. 영화에 안 나오는 지하로 스며든 사람 꽤 많을 줄 안다. 여하튼 오죽하면 깊숙한 비밀 가득한 지하에 갇힌 근세는 햇볕 한번 못 보고 숨어 살지만 동익이 오르시는 걸음걸음에 불빛을 밝힌다. 그것도 꽤나 아프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서.
영화의 백미는 집에서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마당 품은 거실을 차지한 기생충 가족의 장면이었다. 뭐 사실 있는 놈 빨아먹는 거나, 없는 놈들 빨아먹는 자본가나 누가 기생충이다 확언하긴 어렵지만. 내용으로만 보자면 반지하에서 하늘을 본다는 것은 취객의 오줌 줄기나 감상하는 일인데 막힘없는 마당에선 오롯이 하늘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만족감이 아니었을까.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을 그럴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자각. 그럼에도 그들은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딱 누릴 수 있는 부분만 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려 애쓴다. 학습된 결과일까? 아니면 돌 때문일까.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물이 차오르자 역설적이게도 물을 토해내는 변기 위에 앉은 기정(박소담) 이었다. 벗어나는 게 아닌 지키려 발버둥치는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기택의 계획은 계획대로 되지도 않았고 기우(최우식)가 암만 계획을 세운다고 희망처럼 될 수도 없지만 인간의 분노에는 아킬레스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택의 그것은 냄새였고. 아무리 비누를 바꾸고 향기 머금은 세제를 풀어 댄다고 해도 감춰지지도 피해지지도 못하는 신분의 차이. 그게 그에게는 냄새고 자존감이었다.
신분의 계급에서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들은 보는 내내 심장을 쫄깃하게 했다. 그리고 어쩌면 태생이라는 신분은 날 때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가 계획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이 영화가 불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찾아내긴 한 건지 그것도 계획대로 안 된다.
인생은 한 공간에 있다는 게 같은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누군가는 백으로 누군가는 흑으로 눈 가리고 아웅인 세상이겠지. 봐서는 안 되는 걸 봐야 하고, 은밀하기도 그러면서 각자 챙겨야 할 것들은 존재하는 세상. 누구의 것인들 어떠하랴 잠시 탐하거나 빌리거나 그도 아니면 뺏더라도 내 찰나가 즐거우면 되는 것을. 자본가에 기생하는 불평등을 다룬 영화인지 인간 삼라만상을 다룬 영화인지 그의 계획을 끝내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