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범죄를 현실에서 활약하는 유명 범죄 프로파일러가 분석을 한다니 기대도 되고 흥미로웠다. <그것이 알고 싶다>와는 결이 다른 어떤 기대감이랄까. 신문물을 즐기거나 딥하게 탐미하는 편이 아니라서 유튜브도 잘 보지 않을 뿐더러 오디오 클립이나 팟케스트 같은 미디어도 보거나 듣지 않는다. 그래서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오디오 클립 방송이 있는지도 몰랐거니와 들어 본 적도 없다. 하여튼 그걸 책으로 옮겼다. 그래서 난 듣지 않고 읽는다.
두 대담자는 5개의 색션, 가정 폭력, 비판 의식 결여, 성범죄, 계층 문제, 미성년자 보호라는 주제로 16개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첫 영화 <가스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가스 라이팅'이라는 심리학적 용어부터 흥미롭다. 친밀한 관계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힘의 우위로 인해 나도 모르게 타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여기에 두 여성 대담자가 벌이는 열띤 논의는 남성의 가부장적 지위와 남녀관계의 힘의 우위에서 결정되는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같은 문제는 그저 폭력이나 학대를 넘어 페미니즘까지 함의 한다.
결국 영화를 넘어 현실적인 페미니즘을 다양한 영화 속 사례를 펼쳐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두 대담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스크린 속 범죄자나, 특히 성범죄 관련 가해자는 대부분 남자다. 물론 현실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남성은 가해자고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이어야만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한편 놀라운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도 안 되는 법적 제도를 인지하게 됐다는 점이다. 가정 폭력 가해자,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때린 놈은 집에서 편히 있고 맞은 사람이 쉼터로 쫒겨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그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쉼터나 그밖에 몸을 안전하게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는 때린 놈이 쫒겨 나가는 게 당연하다니 그런데 한국은 맞은 사람이 쫒겨나가는 게 당연한 처사라니 정말 부끄럽다. 그것도 일년에 70~80명의 여성이 남편에게 맞아 죽는다니. 말문이 막힌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살아 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고, 우리 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곧 범죄일 확률이 높습니다." p103
경쟁이 치열해지면 질 수록 생존은 잔인해질 수 밖에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선 어떻게든 남을 속이거나 해를 입이거나 그도 아니면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몇 안 되는 선택지가 무섭다. 더군다나 이제 한국은 개인의 노력으로 층간을 오를 수 없다. 내려가거나 추락하지 않으면 천만다행이고. 개천에 살던 용은 모두 승천해 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예전에 20대 성인이 될때까지 가정폭력에 시달린 성인이 복지관으로 도움을 요청해 온 적이 있었다. 알콜릭인 아버지는 술만 마셨다 하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엄마는 "술만 안 마시면 좋은 사람"이라며 남편을 두둔 했다. 엄마는 중증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큰아들은 지적 경계선 장애, 둘째 아들은 시각장애였다.
위기 가정이라 판단해 가족지원센터와 연계하고 폭행 현행범으로 경찰에 신고도 했다. 하지만 이 가정은 여전히 폭행 가해자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가해자와 분리된다한들 경제적 문제 해결도 안 되니 원가정 해체보다는 낫다는 게 피해자인 엄마의 주장 때문이다. 아이들은 늘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다.
이렇게 '원가정이 낫다'라는 말도 안 되는 한국의 가족주의 폐해를 두 대담자가 정확히 짚어준다. 도대체 그 핏줄이 뭐라고 목숨이 위태한 순간에도 따져야 할까 싶다.
또 개인적으로 분개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바로 '살인의 추억'이다. 나는 영화 속 답답했던 건 범인의 소재보다 누가봐도 범인이 아닐 것같은 백광호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박두만이었다. 지가 무당도 아니고 그놈의 감은 도대체 무슨 근자감인지. 어떻게든 범인을 잡겠다고 기를 쓰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 승진이 하고픈 무지막지한 경찰의 본 모습이었다. 그땐 다 그랬다. 서슬퍼런 삼청교육대에 말그대로 아무나 잡아 처넣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수십년이 흐른 지금 범인이 등장했다. 그중 억울하게 범인으로 만들어진 윤 모 씨가 20년이라는 옥살이를 했다. 20년 간 끝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던 그가 느꼈을 억울함과 분노는 가늠조차 안 된다. 더구나 대한민국 공권력은 여전히 강압 수사는 없었다고 발뺌하는 두 형사에게 잠잠하다.
그렇게 제 식구 감싸기만 열중하느라 정의 구현은 안중에도 없다. 세 살 밖이도 아는 것을 검찰도 경찰도 사법부도 다 모른다. 재심도 열리는데 가해자 형사놈들은 여전히 죄책감 없이 산다는 게 내가 다 울화통이 치민다. 꼭 그들에게도 합당한 처벌이 있으면 한다. 그새 잊었던 이 사건을 다시 곱씹게 된다. 암튼 드럽게 정의롭지 않은 나라다.
이 책이 끝까지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영화 속 범죄 스케치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사건에서 뭣이 중허고, 그 사건에 대처하는 우리 정서는 어떻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조악한 사회 시스템까지 고발한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겪는 것들을 영화 속 장면들에서 점접을 만들어 아동 학대나 디지털 성범죄, 사회 불평등의 문제, 공권력의 문제, 인신 매매까지 정말 다양한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재밌다는 것을 넘어 짜리한 책이다.
미처 오디오클립을 들어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내용은 단순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심오한 사회 문제가 회자된다. 그리고 심각하게 '정의'를 생각해 보게 만들며 어느새 그들의 연대에 숟가락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