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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목 May 12. 2020

[사회]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

장애인의 성과 사랑 이야기

읽을 책이 똑떨어졌는데 마침 복지관에 읽고 싶었던 이 책이 있어 얼른 집어 들었다. 한데 책장을 덮은 지금 마음이 시끄럽다. 장애인으로 장애인의 성(性)을 읽는다는 것이 단순하게 독서로 끝나지 않았다. 시작하기에 앞서 김원영 변호사의 글을 읽으며 생각이 좀 조밀해진다. 장애인 성,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욕에 관한 생각이. 그랬지만 그랬을 리 없다고 여겼던 내 성에 대한 관념으로 번졌다.


장애인이 성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결혼을 이야기하면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많다. 못 배우고 변변한 직업조차 없다는 이유로 "네 주제에?" 라거나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빌미로 "굳이 해야 해?"라는 식이다. 나아가 "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처럼 잔인한 말도 스스럼없이 내뱉기도 한다. 그게 21세기 대한민국이다.


나는 장애인이다. 21년은 비장애인으로 살았다. 혈기 왕성한 체대생. 지금이야 희미해진 일이지만 분명 이성에 대한 관심도 성욕도 넘쳤다. 아마 미쳐 날뛰던 정자에 죽을 지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땐 18살만 되면 결혼하겠다고 노랠 불렀다. 누구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귀찮은 듯 "할 수 있으면 해"라고까지 했으니. 근데 목이 부러지고 사지가 제 기능을 잃고 나니 모두 변했다. 있던 여자 친구도 떠났고, 기능을 잃은 것인데 욕구마저 잃은 것처럼 사람들은 그저 기능 회복만 이야기했다. 그 외 것들은 언감생심이고 욕심이라 했다. "딴 생각 말고 죽기 살기로 운동(재활)만 해!"

아는 뇌병변 장애인이 있다. 다소 말이 어눌하고 척추가 살짝 뒤틀려 걸음걸이가 불편한 그는 이제 곧 마흔이 된다. 적극적인 성격에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또 그는 이성에 갈급해 한다. 그렇게 들이대는 탓에 "밝힌다"거나 "꼴값 못하는" 사람 취급받으며 사람들 주변을 겉돈다. 장애인으로 이성이 대한 욕구 표현은 같은 장애인끼리도 터부시 되는 현실에 그는 얼마 전에도 내게 메신저를 날렸다. "샘 주변에 아는 여자 없어요? 저 외로워요."


아마 대한민국이 성에 대해 보수적인 데다가 성 관련 범죄가 극혐 범죄이다 보니 장애인의 성은 더 보수적이고 그들이 밝히는 것이 무슨 질병에 걸린 사람 취급 당하는 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인지적 시스템이나 신체 작동 알고리즘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는 욕구까지 다르지 않다. 이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의 욕구가 천박하고 질 낮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제 좀 진지한 성찰을 해야 할 때다. 아니 늦은 걸지도 모른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밝히는 일은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는 한 부끄러운 일은 아니며, 장애인 역시 기본적 성욕은 당연하고 저급하지 않으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섹스는 사랑이라는 감정적 교감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하게 결혼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또한 그 누구도 욕구 해소용으로 결혼을 갈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장애인의 성에 대한 담론을 단순하게 욕구 배설에 맞춘 윤락업소 허용이라든지 자위 봉사 같은 손쉽게 해결책(?)이랍시고 내놓는 것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는 내용에는 적극 공감하게 한다.

읽다 보면 개인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문장들 앞에 멈칫 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난 데 하나 없는 예쁜 얼굴과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웃음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니 그녀를 본 남자라면 누구나 입안의 시럽을 음미하듯 입맛을 다시며 군침을 흘리겠구나 싶었다.(p18)"라거나 "장애는 개인의 불행이지만, 그 불행을 어떻게 대면하는가는 한 사회가 '장애'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지를 반영한다.(p25)" 같은 말들.


표현이 직설적이거나 일반화되는 말들, 장애가 개인적일 수는 있지만 불행이지는 않지 않은가? 행복이나 불행 따위의 감정은 지속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지극히 개인적이고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다. 어쨌거나 이런 작가의 감정적 표현이나 생각들 혹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살짝 불편함을 동반한 감정을 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전 세계가가 터부시하는 장애인의 성을 노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복지학과에 개설된 커리큘럼 가운데 성은 청소년과 가정폭력, 젠더 등을 다룰 때만 나올 뿐 장애 문제를 논할 때는 한 자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p97


또 한편으로 사회복지사로 자기 성찰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 또한 깨닫게 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종종 맞닥뜨리는 일이기도 한, 전문가라는 입장에서 펼치는 지시적 개입은 여전히 벌어지는 일이다. 반성한다.

  

"직업인으로서의 가치관과 개인의 가치관이 뒤섞이려 할 때 사회복지사는 최선을 다해 도울 뿐, 주제넘게 나서서 상대를 대신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p105
"샤오위는 동그랗고 호감 가는 얼굴이지만 잘 웃지 않는다. 웃더라도 대게는 예의상의 웃음으로 그 안에는 지난한 세월이 가져다준 노련함과 침착함이 스며들어 있다." p130


아, 얼만 저릿한 표현인지. 호감 가는 얼굴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웃는 것조차 노련함과 침착함을 갖춰야 하다니, 예전에 김원영의 책 <실격당한 자들의 변론>에서 보았던 '우아한 핸들링'이란 표현처럼 먹먹하지만 매료된다. 여하튼 장애인의 삶에서 체화된 것들이 다름을 넘는 초월적인 그 무엇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장애인들은 일부러 보이지 않는 구석이나 구불구불한 컴컴한 골목에 몸을 숨기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이다." p242
"신체는 매우 진실해서 부당한 도덕적 속박을 던져버리고, 끓어오르는 마음속 욕망을 직면하게 한다." p244


장애인의 성을 공공 돌봄 서비스로 해결하려던 네덜란드의 사례가 놀랍기도 하고 더 위급한 문제 해결에 밀려 유명무실해진 현재 상황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굳이 매슬로우 욕구를 들이대지 않아도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아닌가. 최소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그 어떤 것보다 결핍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장애인의 성을 포함한 동성애, 젠더 같은 거대한 성에 대한 담론을 담고 있어 내겐 백만 스물한 가지의 생각을 던져줌과 동시에 단 한 가지의 해답조차 찾지 못할 만큼 복잡다단한 책이었다. 쉽게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옮긴이의 한 문장으로 대신한다.

  

"이 책은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이 단지 생존뿐이라는 편견과 맞서 싸우는 책이다." p323


끝으로 비단 장애인의 성뿐만 아니라 장애인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왜 '정상성'에 대해 구구절절 비교하고 그게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나 그대나 그저 우린 같은 사람 아닌가. 여기에 뭐가 더 필요한지. 우린 좀 더 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비정상'의 존재가 아니다.

덧붙여, 장애인 남자와 비장애인 여자로 구성(?) 된 우리 부부는 어떤가?라는 자조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지팡이를 짚고 위태롭게 걷는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걷는 아내의 모습, 그런 우리를 향해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내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어린 아들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미끄러지듯 걷는 나를 부러워하고 풀쩍 무릎 올라타거나 때로는 휠체어 뒤에 매달려 걷지 않는 즐거움을 즐긴다. 또 딸은 사춘기를 겪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들 앞에서 아빠를 불러 세워 한 턱 쏘게 만드는 당당함을 갖춘 것들은 딱히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 가족에겐 그저 일상일 뿐인데 다른 가족과는 다르게 뭔가 대단한 일들을 해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게 사실 좀 웃기다. 여전히 난 때때로 많이 불편해지고 아내는 고생스러워 하지만 그건 가족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사람, 가족들에겐 각자만의 어려움이나 불편함이 있지 않을까? 굳이 장애인 가족이라고 특별하거나 뭔가 다르지 않다. 부러 다르다고 생각하려 애쓰지 말길 바란다.


멋지다.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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