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도 될 수 있고 누구도 아닌 그 시절의 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온 아이는 여동생과 노는 일상에서 벗어나 동년배들의 무리로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남자 같은 여자애나 여자 같은 남자애나 상관없이 아이들은 그저 또래로서 충분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웃고 떠들고 뛰어놀고 땀 흘린다. 로레(조 허란)도 그렇다. 다만 이름을 미카엘로 바꿔 얘기해줬을 뿐이다.
감독은 로레의 내면의 성장을 통해 정체성이 타고난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게 한다. 그러는 한편 관객의 유년을 떠올려 관념이나 친구를 규정하는 잣대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자아가 미성숙된 아이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대로 정체성을 만든다. 그래서 원하지 않아도 다른 성을 갖는 일은 죄가 아님에도 죄가 된다. 소녀가 파란색을 좋아하면 유별난 게 되고 소년이 핑크 색을 좋아하는 건 모자란 게 되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아무 데서나 훌렁훌렁 벗을 수 있는 것이나 서서 소변을 해결하는 행위나 원피스 혹은 칼라로 성을 결정짓는 일이 정당할까?
타고 난 모습보다 좀 더 활기차고 와일드한 성향이 좋아서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들이 행복함에도 가족의 시선이나 또래 무리의 시선이 혐오를 향한다면 우린 결국 그들에게 물어야 하고 그들은 죽기보다 싫지만 답해야 한다.
"넌 누구야?"
어쩌면 미카엘은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만들어 집어넣은 '상징'을 은밀한 자신의 비밀 공간에 보관하는 것으로 젠더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줄기차게 불안한 시선의 엄마는 결국 사회문화적 통념 앞에 노골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있느냐"라고 다그치듯 로레가 아닌 미키엘로서 벌어질 책임을 떠넘기는 엄마의 체념에서 읽히듯 미카엘 역시 그동안 눈치와 이웃들의 시선에서 지쳤을 것이다.
타고나는 것은 내가 결정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내가 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마저 사회문화적 관념으로 정하는 게 옳은 것인가 질문한다. 또 미카엘이 로레임을 짐작하면서도 끌리는 감정을 감출 수 없는 리사(진 디슨) 역시 로레가 아닌 미카엘이었을 순수한 감정의 끌림이었을 것이다. 사회문화가 규정해 놓은 선 자체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마지막 미카엘의 미소는 로레의 정체성의 혼란을 끝내는 미소였는지 아니면 리사와의 우정을 선택한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아이들의 순수하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면 더 이상 안 되는 그 무엇이 왜 그런 것인지 관객 스스로 자문하게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