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 샤덴프로이데
제목에 끌렸다. 어쩜 이리 본성을 자극하는 제목을 생각해냈을까.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사돈이 땅을 사면 배 아프고, 산 땅이 시세가 떨어지면 살짝 고소한. 분명 놀부만 그런 건 아닐 거다. 지질하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남들도 그렇다니 웃프기도 하고 위안도 된다. 타인의 불행이 가져오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샤덴프로이데라고 한다.
그렇다고 타인이 절망 앞에 기쁘다는 것은 아닐 테고 적당히(?) 고소한 흐뭇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저자도 악의적인 기쁨일 수 있지만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근데 난 '고작?'이라고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가 좀 더 사악하긴 하다. 크크.
영어에는 없다는 이 묘한 감정의 단어가 한글에는 있을까? '타인의 고통에서 느끼는 사악한 감정'이라는 이 단어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쌤통'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온라인이 극도로 발전된 현대에는 이 감정 역시 덩달아 발달했다. 누군가 이론적 무장으로 있어 보이는 글을 올렸다면 살짝 '잘난 척'이란 감정이 들 때 그 댓글에 공감의 댓글보다 다른 이견이 그럴싸하게 달렸을 때, 그것도 논리적이고 전문적인 반박일 때 우린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어 덩달아 헐뜯는다. 이론도 생각도 개념도 주장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말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깨소금을 볶는 느낌이 바로 샤덴프로이데다.
개인적으로 생소한 이 단어가 주는 도덕성의 배제적 측면이 아니라 이미 관계라는 자체가 이타적보다는 개인주의적 부분이 더 많아진 세상에서 저자의 말처럼,
"샤덴프로이데는 소외와 분열을 부추기는 감정처럼 보일지 몰라도 거기에는, 혼자 실의에 빠지기보다는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는 우리의 욕구가 담겨 있다." p33
정도로 해석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불구경이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라는 정도면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다칠 수 있는 일에는 안타까운 감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예능에서 "나만 아니면 된다!"라고 부추기는 건 이제 그만 했으면 싶다.
"한편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 자수성가한 사연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상처럼 찬양받는 그들이 밉고, 그들이 그런 인기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시험받고 가능한 한 극적으로 몰락하는 순간을 고대한다." p164
내가, 우리 팀의 실패보다 상대나 그 팀의 실패가 더 고소하고 짜릿하다는 게 인간 본성일지라도, 설령 그럴지라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는 이야기에는 백퍼 공감한다. 누군가의 웃고 마는 실수를 넘어서 다치거나 위험한 것에 대한 걱정이 더 먼저 되어야 한다고 저자 역시 지적한다.
이 책은 샤덴프로이데를 소개하고 이 단어가 가진 은밀하고도 살짝 흥미로운 감정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지질하다고 자책할 수 있는 이 감정이 인간의 순수한 본성이며 나아가 어떻게 이 감정이 지질한 것에서 멈추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더 흥미롭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