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만 바라보다 오늘을 놓치는 나에게 건네는 말
솔직히 이 책을 덜컥 서평단에 줄 선 이유는 비뚤어진 마음이 조금 있어서다. 표지에도 있지만 '내일만 바라보다 오늘을 놓치는' 것에 대해 왠지 노후를 염려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팍팍한 오늘을 사느라 행복을 놓치는 것처럼 여기는 말이 가시가 걸린 듯 따꼼거렸다.
팍팍한 현실에 욜로족이나 소확행 같은 말로 청춘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확실한 오늘이 중요하다는 분위기는 이해한다. 근데 사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오늘 소비를 부추겨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이 쉰이 넘어가다 보니 눈에 보이는 불확실한 미래는 생각보다 크고 넓고 깊다. 망망대해처럼 끝도 보이지 않고 칠흑같이 어둡고 발도 푹푹 빠져 서있기도 걸어가기도 쉽지 않은 사막 한가운데 서있는 듯하다. 그래서 난 '오늘만 보내려다 내일을 준비하지 못하는' 일이 더 무섭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일만 준비하는 일도 어리석지만 오늘이 힐링이나 행복 같은 감성적인 '감각'으로 소비되는 게 염려된다.
아, 빨리빨리 달려야 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빨리 달려서 멀리 가는 것은 목표에 빨리 다가가는 게 아니라 빨리 포기하는 지름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입시지옥을 견디는 딸아이가 대견하다.
"여행이 참 좋은 게 내가 어떤 순간에 행복해하는지 알게 된다는 점이다." p56
"세상은 너무 다양한 상황들과 규칙들이 있다. 규칙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규칙이 되고, 규칙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p66
노 프라블럼의 나라! 정말이지 가보고 싶은 곳이다. 오죽하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라는 광고가 다 있을까. 그런 나라를 이렇게 딱 한 문장에 녹여낼 수 있다니 작가의 감각적 글이 가슴을 흔든다. 우리가 인생에서 정해 놓은 수많은 것들이 무질서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다시 질서를 만드는 것을 경험한다는 건 어떤 도대체 느낌일까. 작가의 깊은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공감이 돼서 인도의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나를 휩싸는 듯하다.
이렇게 많은 나라들을 순식간에 넘나드는 이야기에 달뜬다. 기회가 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작가가 말한 그 마법 같은 장소, 동루이스 다리와 비현실적인 그곳, 우유니에 가보고 싶다. 쏟아지는 별을 이불 삼아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도.
몸이 불편하다는 게 하지 못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일이지만 대부분 엄청난 제약을 헤쳐 나가야 하는 휠체어 장애인에게는 여행, 특히나 세계를 관통하는 일은 작정을 했다고 해도 넘사벽이다. 그저 책으로 남들이 다녀온 여행으로 넘나드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여행을 달랜다.
작가가 작정하고 100일 동안 넘나든 세계의 수많은 도시와 이야기는 충분히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어서 내심 고마웠다. 짤막한 도시의 경험담은 '내가 간다면'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작가의 백일몽을 함께 했다. 그리고 대단함과 부러움이 동시에 들었다. 성에 대한 편견을 갖는 건 아니지만 이국에서 석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젊은 처자 홀로 낯선 곳 그것도 사람 많은 대도시가 아니라 소도시를 활보한다는 건 '대단하다'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장애가 좀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용기 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무모한 건지 도 모르지만 이 벌렁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용기가 없는 게 확실하다.
"2년을 피땀 흘려 공부한 대가로 얻은 자격증으로 20년짜리의 안정감을 얻었다"라는 고백은 어쩌면 이런 불안한 여행자의 삶이 가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조언일 수 있겠다. 미래에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느냐의 자신감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보험 같은 거랄까. 그래서 이 처자가 더 멋지다. 현실과 이상을 모두 가진 자의 여유가 한껏 느껴진다.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걷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 위해서 이 고통을 극복해야 할 사람은 우직 나뿐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며 다시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p277
친구를 가슴에 얹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고행담은 작가의 솔직한 심경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덕분에 이 문장에서 딸아이가 생각났다. 월드컵둥이인 녀석은 생애 첫 수학여행을 안산 언니, 오빠들의 가슴 아픈 사고와 맞바꿨다.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아이의 가방엔 노란 리본 배지가 달려있다. 그리고 고3인 올해 코로나 19와 입시를 맞바꾸고 있다. 학교에서 준비해야 할 입시 준비와 모자란 학업량을 학원으로 독서실로 올빼이처럼 옮겨 다니는 아이가 안쓰럽다.
입시는 인생에 아주 작은 부분이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이런 엄마 아빠가 도움이 안 된다며 입을 삐죽 댄다. 닥친 현실에 딱히 도움이 되는 응원가는 아니었으리라.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그 시간 안에서 뭐라도 되지 않겠냐는 게 우리 부부의 태평함이 있다. 사실 부모가 전전긍긍한다고 해서 아이의 성적이 쑥쑥 오를 것도 아니고 선택지를 정해준다고 다 잘 될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그저 아이가 선택하고 결정한 도전이 포기가 아닌 실패라면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나 걸어 나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걸음처럼 딸 이이가 겪어야 할 걸음도 힘찬 걸음이길 소망한다.
끝으로 나이 먹은 꼰대의 입장에서 오늘을 즐겁게 살아내는 작가의 빛나는 순간과 행로를 응원할 수 있는 입장으로 바뀌게 해 준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