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강렬한 이유는 제목만으로도 확장 가능한 이 인권의 참담함이 독자 모두에게 전염된다는 거다. 나는 '단지 장애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라고 읽혔다. 또 "그들은 장애를 모르고, 나는 안다."라는 말과 함께. 이 책은 마치 색칠 공부처럼 줄이 쳐지지 않은 문장을 찾기 어려울 만큼 감정이 힘겹다.
미국 인권가이자 목사, 그리고 작가이기도 한 제임스 볼드윈의 두 편의 에세이를 담은 이 책은 인간이 배제된 흑백의 피부색에 대한 부당함과 종교적 맹목적 신앙이 만들어내는 불합리함을 맹렬히 그러면서 한편으로 통렬하게 자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짓눌리고 짓밟히는 상황에서도 희망은 '수용'과 '통합'이 아닌 그 너머의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그의 인식의 관점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를 갓난아기 때부터 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기까지 오래도록 사랑하다 보면 시간과 인간의 고통과 노력에 대해 묘한 관점을 갖게 된다." p22
척박한 인권, 그러니까 흑인(그는 니그로라 하지만) 인권에 대해 담담히 적어내려간 볼드윈이 조카 제임스에게 보낸 편지는 울분을 내리누른 채 (대중을 향해) 연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장했다. "이제 너 역시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동지애가 느껴질 정도로. 그 역시 사랑하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담는다.
"사람들은 아는 대로 행동하기를 매우 어려워한단다. 행동한다는 건 헌신한다는 것이고, 헌신한다는 건 위험에 뛰어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p27
그러면서 그는 '위험'은 흑인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래서 백인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이라고 흑인은 그저 백인이 세워둔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백인이 쳐놓은 우리처럼 게토에 살아야 하는 부당함을 알린다. 한데 이 말이 밖으로 돌아다니면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격리하고 감금했던 과거 장애인 시설을 떠올리게 했다면 억측일까.
세상은 공평하지 않았고, 고작 열 살 소년을 납작 엎어 놓고 위협하는 불평등한 세상에서는 "범죄는 하나의 가능성이 아닌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그의 말은 사실 이제부터 나쁜 일만 남았다는 이야기며 별다른 삶의 선택지 따위는 가질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그의 인생이 채워졌을지 모르겠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생생하게 욕망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은 일들을 참회하며 보냈다." p61
나 역시 하지 않은, 그러면서 생생하게 욕망하는 일들을 실행하거나, 하려 하거나, 할 수 있으리란 생각'만' 하며 실천과는 거리가 먼 삶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무얼 참회해야 할까? 나에게 도대체 사회복지는, 장애인 복지는 무엇인지 도돌이표처럼 되묻는다.
"'감각적'이란 삶과 삶 자체의 힘을 존중하고 기뻐하며, 사랑부터 빵 굽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현존하는 것을 뜻한다." p70
미국이란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을 이 종교라는 권위적 억압을 흑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것과 일맥 상통한 개념으로 묘사한다. 코로나19로 세상은 2m로 좁아진 요즘 볼드윈의 말처럼 '신자들이 바닥을 걸레질하여 번' 돈을 헌금이라는 상납급처럼 통에 담는 동안 일부 목사는 집 여러 채와 캐딜락 여러 대를 갖게 되는 것처럼 맹목적 신앙을 빌미로 이웃의 생명을 탐하는 요즘 신앙인들의 민낯을 보는 일은 달갑지 않다. 그들은 신으로 가는 계단에서 통행료를 갈취하는 느낌마저 준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나는 대면 예배를 목숨과도 바꿀 수 없다"던 그는 자신이 목숨을 버릴 각오니 내 이웃도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로 퉁치려는 건지 그들의 공동체의 상식이 딱 헌금통에 매몰된 현실이 측은하다.
"우리가 한 싸움은 당신의 싸움이기도 하다." p86
장애인 활동가들이 목에 쇠사슬을 걸고 도로에 드러누운 장면의 사진이나 신문 기사를 보면서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활동가는 으레 저렇게 과격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시민의 불편을 담보하는 것이란 생각. 눈살을 찌푸리는 정도로 나는 저들과 다르다며 외면하던 시간이 있었다. 아니 여전히 가볍지 않을 만큼 짊어지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렇게까지"는 "이럴 수밖에"로 공감의 폭이 넓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데, 그중 일부는 백인이라지만 피부색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p104
피부색에 대한 그의 표현이 감각적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두려움의 원천이 단지 피부색뿐이었을까 싶었다. 그 오랜 세월, 그러니까 아메리칸 흑인들의 흑인들의 흑인들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후부터 그렇게 핍박과 멸시와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인고했던 억울하고 분노에 찬 가슴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사랑받았다면 블랙은 지금 그 블랙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흑인들이 권력을 잡는 일은 '지극히 가능성이 낮다'라며 체념했던 그의 무덤에 조용히 당신들, 그 아메리칸 흑인들 중 한 사람이 그 어려운 일을 해냈었다고 속삭여 주고 싶기도 하다. 그가 봤다면 희열 그 자체였을, 로버트 케네디의 확언 후 40년이 자난, 대선의 그날 말이다. 하지만 그랬다고 그들의 삶이 딱히 바뀌진 않은 일은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할지 난감하지만.
옮긴이가 '나의 감옥이 흔들렸다'에 대해 언급한 '수용'에 대한 해석은 태풍 바비가 몰아치는 이 습하고 후텁지근한 지금 얼어붙게 만들었다. 차별적 존재라는 입장에서 부당하고 불평등한 상황을 증명하려 애쓰는 장애인이 오히려 차별이라는 시스템에서 자유로워질 때 진정 차별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별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만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차별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2020년, 여전히 차별로 둘러싸인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적으로 각성하게 만드는 감각적 도발이다. 자, 이젠 '세상과 나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