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목 May 28. 2022

우린 함께 블루스를 출 수 있을까

우리들의 블루스를 통한 장애 담론

출처: https://theqoo.net/index.php?mid=square&document_srl=2369302729


팍팍한 현실은 누구에게나 팍팍하고 그 안에서 감내해야 하는 것들은 크든 작든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다는, 그래서 인생이 고루 한 것이라는 위로와 위안을 전하는 드라마라 생각했다.


첫사랑을 쓰디쓴 독주로 마셔야 했던 은희나, 그런 그녀에게 비루하게 나타나야 했던 한수가 그랬다. 추억은 첫사랑쯤은 그렇게 밟아줄 수 있었다. 마음이 있으되 온기가 없던 동수의 첫사랑 역시 그렇게 떠났고, 돌아왔다 시리게 곁에 맴돌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기에 맺어진 우정은 각자의 오해로 흔들리고 춤춘다. 그렇게 제주라는 바다로 둘러싸인 떠난 이와 떠나지 못한 어쩌면 않은 이들의 삶이 한데 엉켜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추억 속 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숨 쉬던 자신을 끄집어낸다. 그들의 블루스에 리듬을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드라마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감정은 리셋된다. 어린 자식들의 이야기에 울컥하다가, 그 자식들의 홀아비들의 싸움에 슬픔이 북받치다가, 끈끈한 우정에 달뜨다가, 첫사랑이든 비밀 가득한 사랑이든 어쨌든 사랑에 므흣해진다.


그러다 이젠 고마워지기 까지 했다.


영희가 등장했다. 물론 그전부터 쭈욱 별이가 있었다. 조용히 커피차를 밀며 수어를 하며 그들과 섞여 있었지만 두드러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달이 동생 별이로, 시장에서 어시장 좌판에서 그냥 남들과 다르지 않게 튀지 않게.


한데 영희는 등장만으로 튄다. 생김새의 문제일까. 잘생겼다, 못생겼다, 개성 있다의 문제가 아닌 다르다, 라는 관점은 분명 결이 다르다. 그래서 작가는 영희를 조금 더 부연한다. 다운증후군이라고.


작가는 그의 작품 속에서 장애를 자주 녹여낸다. 다른 작품은 차치하자. 고맙지만 아쉽기도 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에서 장애는 여전히 다르며 조심스럽다. 별이처럼 그냥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도 되는 장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도지 영희처럼 확연히 구분되는 장애는 쳐다봐서는 안 되는 조심스러운 대상일 뿐이라서, 옥동과 춘희가 더 이상 쳐다보지 말라고 야단하고 다들 모여 앉아 영희를 아이 대하듯 할 때나 두 집 건너 한집이 다들 그런 아이들이 있다는 혜자의 말이 되려 더 선을 긋는 것처럼 들렸다.


영희는 분명 외모가 튄다. 그러면 쳐다보게 되는 게 당연하다. 쳐다보면 안 되는 게 아니라 훑는 게 안 되는 거다. 그건 누구에게나 무례한 것이므로. 예를 들면, 내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나서면 아이들이 신기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이들은 바퀴 달린 의자를 본 적도 없고 그게 달리기까지 하니 얼마나 신기한가 말이다. 한데 아이들은 딱 거기까지다. 호기심에 한번 만져보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궁금증이 해소되면 지 갈 길 간다.


그래서 모르면 찾아보라는 영옥의 말대로 정준은 찾아보고 영희를 영희로 보게 된다. 정준의 대사는 그래서 고맙다. 다운증후군을 몰랐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몰라서 잠시 놀랐을 뿐이라고 근데 이제 알았으니 됐다고.


울컥해서 화면이 뿌예졌다. 사실 다르다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다르게 보는 게 문제가 아닐까. 어디에서도 어디가 얼마만큼 왜 다른지를 알려주지 않으니 다른 걸 모르고 모르니 모른 체하고 멀리하는 게 아닐까.


혜자 삼촌 말대로 두 집 건너 한 집은 아니어도 다섯 집에 한 집은 다른 이가 있다는 게 보건복지부 통계니 믿어도 된다. 우린 그렇게 많은 다른 이와 살고 있는데도 함께 사는 법을 아직 모른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만 돌리는 게 얼마나 참혹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영옥과 영희를 통해 보여주는데 치매나 노인 돌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울림이 적지 않다.


장애인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다른 게 생겼을 뿐이고 그게 그 사람이 아니다. 다운증후군 영희가 아니라 그냥 영희인 것처럼. 사고로 지체 장애인이 됐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자다 말고 뜬금없이 왜 이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다시 잘 수 없을 만큼 지워지지 않아서 휘갈겼다.


#우리들의블루스 #장애담론 #돌봄 #생각

매거진의 이전글 ‘장판’에서 푸코 읽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