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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목 Feb 24. 2023

4705호에서 장애는 어떤 의미인가

: 장애인과 환자의 경계

수술한 어깨는 참기 힘든 통증이 지속 됐다. 하지만 병원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방침이라며 수술 이틀 만에 퇴원시켰다.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한 채 5개월이 지났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복직을 해야 했다. 파스로 도배하면서 버텼지만 결국 시달릴 만큼 시달리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60일의 병가를 내고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4705호. 화장실 벽 쪽 가장 좁은 자리를 배정받았다. 있는 동안 치열하게 살아야 할 곳이라 생각하니 더 답답하다. 병실에선 모두가 환자가 되나? 내 눈에는 모두 장애 당사자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이를 비롯한 장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 이외 세 명 모두는 뇌기능 환자다. 익숙한 ‘장애인’이란 호칭이 ‘환자’로 바뀌었다.


환자에 대해 생각한다. 장애는 있지만 딱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닌데 환자라니 좀 어색하다.     


Y 씨는 2달 입원 치료 후 퇴원하고 다른 곳을 전전하다 다시 입원하기를 세 번째다. 그는 아무리 재활을 해도 진전이 없는 자신의 몸 때문인지 요사이 많이 예민해졌다 한다. 어서 빨리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싶은 간절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는 뇌신경손상으로 2년 가까이 회복되지 않는 상태임에도 병원을 전전하며 재활을 멈추지 않는다.


반면 Y 씨 옆 침대 L 씨는 첫 번째 입원인데도 하루하루 눈에 띄게 기능이 회복되는 중이다. 이런 L 씨의 회복 속도에 Y 씨의 심기는 가끔 노골적으로 불편해진다. 그런 그를 지켜보면서 이미 30년이 넘게 회복되지 않는 내 몸이 Y 씨에겐 기시감처럼 느껴져 좌절감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병원을 돌아다니는 데도. 


에이, 내가 무슨 장애인이냐?


세 명 중 두 명이 팔다리 한쪽을 쓰지 못하는 편마비 장애다. 사회복지사 오지랖에 슬그머니 병원은 오래 있었냐? 치료는 얼마나 했냐? 등등 초기 상담이 됐다. 그리고 장애 등록이며 지원 정책, 지역 복지관 이용 등 앞으로 준비해야 할 장애인으로의 삶에 이로울 정보를 알렸다. 한데 가만히 듣던 Y 씨 반응이 뜻밖이다. 자신은 장애인이 아니라서 그런 건 필요 없다는 말투에 단호함이 서렸다. 누가 봐도 장애인데 본인만 아니라니 좀 씁쓰레했다. 얼른 치료하고 집에 가서 반려견을 산책시켜야 한다는 Y 씨의 말속에는 "나는 아직 장애인이고 싶지 않아!"라는 속내가 있는 건 아닐까? 그를 보며 장애를 생각해 보지 않은 장애인에게도 장애는 낙인이 되는가 싶었다. 


보통 갑작스러운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같은 운동을 해도 장애인에겐 재활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전히 예전의 몸을 욕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데 Y 씨처럼 예전의 몸을 욕망해 극복에 집착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의 기능을 최대한 살려 삶의 만족도를 좀 더 높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한쪽을 쓸 수 없어 중심 잡고 직립보행이 불가능하다면 극복하는 것보다 수용하고 휠체어를 타도된다. 수동휠체어가 어렵다면 전동 휠체어도 좋다. 반려견 산책은 물론이거니와 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다양해진다. 또 직업적 측면에서도 하던 일이 두 발로 서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역시 예전처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보행 연습 중인 Y 씨. ⓒ정민권


왜 안 하려고만 해!!


Y 씨 아내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환자는 안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안 되는 거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몸은 본인이 제일 답답하다. 본인은 얼마나 움직이고 싶겠는가. 내 모습은 원래 이러지 않았다,라는 좌절에 빠지거나 회복되지 않는 기능을 되찾는데 집착하는 동안 시간은 줄기차게 흐르고 더 큰 후회를 남길 수 있다. 재활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살려 일상으로 복귀하게 돕는 것이지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든 갑자기든 장애가 생겼다면 자신의 삶에 잘 스미게 하는 게 필요하다. 무조건 극복의 프레임에 매달리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을까? 잘할 수 있는 것들은 여전히 잘할 수 있게, 혹 잘할 수 있던 것들이 잘할 수 없게 되었다면 또 다르게 할 수 있는 것들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국어사전에 환자는 병들거나 다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간의 정함이 없이 쭈욱 환자 상태인 걸까? 나는 다친 후 30년 간 장애가 있다. 병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시작이야 어찌 됐든 몸이 아프거나 치료를 받지 않는 상태의 몸은 환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분명 Y 씨는 치료 중이긴 하다. 하지만 본인도 어느 정도 예감하는 장애인의 삶은 분명 환자와는 결이 다르다. 


세상은 장애에 맞춰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극복과 수용은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한다. 우린 예전처럼 활기차고 우아하게 만족도 높은 장애를 경험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환자는 치료의 대상이고 수동적인 반면 장애인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존재가 된다.


* 도서 <우리에 관해서: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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