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The First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의 20대는, 90년부터 시간이 멈춘 거나 마찬가지였다. 체육학과생이었던 나는 혈기왕성을 넘어 펄펄 날아다녔다. 그러다 목이 부러졌다.
손가락 하나 딸싹 못했다. 움직임이 사라졌다. 눈만 깜빡이는 정도로 세상과 소통이 허락됐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났다. 운동으로 다부졌던 가슴이 앙상하게 뼈가 드러나고 나서야 침대에 기대앉을 수 있었다.
할 수 있던 것들이 대부분 할 수 없게 되는 일은 견뎌내기 쉽지 않았다. 슬램덩크는, 빨간 머리 강백호는 이런 그런 나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들이 뛰며 흘리는 땀이 내가 흘리는 땀처럼 느껴졌고 그 숨결이, 땀내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 권 한 권 모았던 단행본이 전집으로 책장에 꽂혀있다. 그렇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내 사라진 20대의 한 페이지를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기대한 것만큼의 뜨겁게 되지는 않았다. 오합지졸 북산고가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서사가 이 짧은 시간에 담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다 싶다.
그래서 왜 격돌하는 상대가 산왕인지 능남의 윤대협, 상양의 김수겸이 아니라 산왕공고의 정우성인지 설명이 없는 채로는 불친절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왼손은 거들뿐'이라거나 "포기를 모르는 남자"나 "영광의 순간은 바로 지금" 같은 주옥같은 명대사가 넘쳐날뿐더러 극한의 경기를 통해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알게 되거나, 각자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자존심을 내려놓으며 상대를 인정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장면들은 보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격렬한 관계 속에 채소연, 이한나와 얽힌 므흣한 애정사도 한몫한다.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한편, 채치수와 강백호, 서태웅 사이에 낀 키 작은 2학년, 그러나 상당히 까칠한 천재 가드 송태섭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것은 살짝 아쉬웠다. 감독은 원작에서 큰 조명되지 않은 송태섭을 전면에 내세웠다지만 애정하는 서태웅이 아니라 살짝 그랬다.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슬램덩크는 각 인물의 서사가 조명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까칠한 걸로 치자면 서태웅이나 정대만도 만만치 않은데 이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시리즈를 이어가게 될지 궁금하다.
아무튼 시간을 되돌린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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