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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목 Jul 06. 2024

[소설] 우리가 본 것

| 콘텐츠 공해 속 위험한 세상

초판 65만 부 판매, 전 세계 14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네덜란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인 하나 베르부츠의 흥미진진한 소설로 현재 TV 드라마로 각색 중이라는데 어떻게 제작될지 궁금하다. 소셜 미디어의 유해성에 주목해 유해 콘텐츠를 찾고 지우는 사람들을 둘러싼 이야기로 뭘 상상해도 그 이상이 될 것 같다.


시작은 성은 모르는 이름이 케일리의 자기 고백적 내레이션을 듣다가 문득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올랐다. 적절한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냥 나는 그랬다. 반인륜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도 히틀러가 시키니까 한 것뿐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했던 아돌프 아이히만과 닮았다.


케일리의 고백처럼 생활고에 시달리다 헥사에 흘러들고 그곳에서 눈뜨고는 보기 어려운 콘텐츠들을 하루 종일 눈을 크게 뜨고 검열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 콘텐츠들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결국 뇌 회로가 정지된(케일리의 표현 대로) 채 뭘 하는지도 모른 채 그것들을 놔둘지 삭제할지 가이드를 찾는 동안 유해성이나 죄의식은 점점 사라지고 시키는 대로 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핑계로 들렸다. 시작은 어쨌거나 그랬다.


"사랑은 감정과 행동으로 채우는 포인트 적립 카드가 아니라, 욕망과 두려움의 합산 같은 거라서." 71쪽


그런가, 사랑은? 여하튼 '유해'한 콘텐츠를 종일 들여다 봐야 하는 감수팀 사람들의 고난도 노동 착취 현장의 탐사 같은 분위기에서 갑자기 사랑타령으로 장르가 바뀌어 버려서 은근히 김이 샜다. 좀 더 강렬한 것을 원했던가? 그래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저 케일리를 귀찮게 하는 부류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읽어가는 동안 헥사를 둘러싼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가가 조금씩 달라진다. 늘 웃던 사람은 더 이상 웃지 않고, 잠을 자지 못하고 자더라도 악몽에 시달리더나 자주 깬다. 헥사 밖에 있었다면 무시하고 말았을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고층에 올라 선 사람만 봐도 놀라고 섹스에 탐닉하게 되는 일상의 경계가 흐리멍덩해져 가는 사람들을 지켜봐야 하는 찝찝함이 묻어난다.


"시흐리트가 무슨 꿈을 꿨는지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조차도 다시 떠올리기 싫은 것들뿐이었어요. 적어도 헥사의 책상에서 멀리 떨어진 캄캄한 밤에는 더더욱 생각하기 싫었죠."92쪽


그러다 시흐리트가 케일리를 떠났던 날이 하필 내 생일이라서, 그 이유가 홀로코스트라서 더 기분이 묘해졌다. 뭐랄까. 별안간 팽팽하던 줄이 뚝 끊어지듯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돼버린 것처럼 소설이 끝을 내버렸다.


유해성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케일리의 뇌가 기능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겠거니 하며 얼마간 멍해진 뇌로 추측할 뿐이다. 유해성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게 얼마나 심각한지 고발하는 데 그 상태로 연애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나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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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하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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