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으로 뛰쳐나온 히키코모리
예전에 이효리가 한 방송에서 어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뭐가 되지 않아도 돼."라고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마 동행한 누군가 먼저 아이에게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나 그랬던 것에 대답처럼. 그때 체기가 싹 쓸려내려가는 느낌이 얼마간 있었다.
우린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공부도 취업도 결혼도 자녀 양육도 다 마찬가지다.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그 쓸모를 증명해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쯤으로 안도할 수 있다. 어릴 때 부모나 어른으로부터,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우린 그렇게 뭐가 되어야 한다거나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을 배우고 자랐다.
그랬는데 딱히 뭘 하다 보면 그런 쓸모를 보여줄 수 있다니 좀 당혹감이 있다. 우린 적당히라든지 목표를 정해서 미친 듯이 달리지 않으면 뭐가 되지 못한다고 의식하고 있는 터라 나 역시 내 아이들에게 그 쓸모를 강요하는 편이다. 얼른 읽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작가 사이토 뎃초는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나고 대학 졸업 후 취업 실패로 은둔형 외톨이가 됐다. 방에 처박혀 우연히 보게 된 루마니아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영화 <경찰, 형용사>를 보고 루마니아어에 꽂혀 독학으로 루마니아 문화와 소설과 시를 썼다. 심지어 일본어가 아니라 루마니아어로. 그러던 중 온라인 문예지에 엽편소설을 발표하며 일본인 최초의 루마니아어 소설가가 되었다. 루마니아에서 독특한 필치의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희한한 인물이다. 소설을 써낼 역량이 있다면 어쨌거나 자국의 언어가 편할 텐데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쓰다니. 얼마 전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유명 대학에 대기업 출신의 남성이 10년 동안 한자리를 떠도는 사연이 나왔는데, 이혼이 실패로 여겨지는 경험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저자 역시 취업에 실패해서 세상과 단절했다는 이야기가 마음이 쓰였다.
한데 의외의 이런 성공담이 신비한 일이기도 했다. 힙한 영어 하나도 미친 듯이 어려운데 작가는 희귀한 루마니아를 비롯해 여러 언어를 독학으로 한다니 놀랍다. 나는 트위터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읽고 서평을 쓰면 어쩌면 <지바루>의 그가 아는 체 해줄런지도 모르겠다는, 판타지가 생겼다.
주로 히키코모리 그러니까 은둔형 외톨이 그러니까 왕따 내지는 스따(스스로 따돌림 당하는 사람)는 참 부정적인 인식이어서 보통은 자칭하지 않는데 그는 스스로 그렇게 불러달라고 애원한다. 히키코모리 생활이 아름답다고 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아닌가? 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시간이 초등학생이 씹던 껌을 꺼내 침이 흥건한 손으로 쭉쭉 늘리다 다시 입에 넣고 씹는 것처럼 지저분하게 늘어났다는 그의 히키코모리 생활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서 자꾸 피식거리게 된다. 혹시 흰 줄이 위아래로 죽 그어져 있는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아, 웃을 일은 아닌데. 미안하다.
“비평이든 창작이든, 스포츠든 어학이든, 나아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부 모방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35쪽, 우울증, 지진, 은둔
히키코모리의 최악의 친구인 초조함을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영화 비평이 결국 작가에게는 살고 싶다고, 살아내고 있다고 알리려는 행위였다는 것이 또 한 번 가슴을 후빈다. 자칭 히키코모리라 하지만 정작은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웠을 시간이 많이 공감 된다. 그는 우울에서 자살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무작정 썼을 테지.
뜬금없지만 반색하며 그에게 나도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한국어에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일본 아줌마들 이야기 끝에 나온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좋아한다는 그에게. 나도 한때는 교복 입은 쿠조 죠타로의 매력에 흠뻑 빠졌더랬다. 한데 그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
그리고 뜨끔할 정도로 차별에 대해 지적하는 내용도 있다. 뭐냐면, 블랙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어느 면에선 인종차별적 언어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블랙 컨슈머, 블랙 리스트, 블랙 유머 같은.
평범한 단어에 블랙이 붙어 부정적이고 마이너스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돌고 돌아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맞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말았다.
한편, 소설가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배출한 일본인으로 루마니아 문단에 루마니아어로 소설을 쓰는 자신의 부심을 포기에 가깝게 내려놓는 이유를 들으면서 이제 한국의 작가들은 한강의 작품이나 일상 정도는 꾀고 있어야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또 한 번 피식거렸다.
뒤로 더 읽다 보면, 그저 외국인이 외국어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뿌듯함을 넘어 언어학으로 언어와 언어의 연결성이나 새로운 언어의 재탄생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는데 그저 방구석 히키코모리라고 하기엔 너무 훌륭하다. 근데 그가 혹시 한글을 좀 안다면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많은 한글을 줄임이나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지 안다면 꽤나 신기해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다수에 속하는 존재이므로 논바이너리를 포함해 성에 관해 살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있고, 그 과정에서 배워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176쪽, 논바이너리한 언어
참 멋진 생각 아닌가! 일본인으로 루마니어를 한다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하고 그런 인식의 문제를 정체성으로 확장하는 힘을 갖춘 그의 멋짐이 뿜뿜했다.
솔직히 히키코모리는 어딘가 부족한 사람임에도 뭐든 노오오오오력만 하면 작가처럼 될 수 있다는 메시지의 자기계발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다. 비단 히키코모리가 아니라 누구라도 필요에 의해 즐기면 이런 일도 벌일 수 있다는 자기주도형 히키코모리 백서 같은 책이다.
물론 모든 히키코모리가 그와 같을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이 책은 그걸 알려준다. 그냥 자신에게 맞는 무언가를 적당히 하고 싶다면 그보다 조금 더 하고 싶게 만든다. 은둔하며 수련에 매진하는 무림 고수처럼. 그의 히키코모리적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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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