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세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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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Jeong Youn Hee


내게 생활필수품이기도 한 만년필은, 보통 한 자루만 쓰지 않고 잉크 색상을 달리해 여러 개를 병행해 쓴다. 여러 개라고 썼지만 스무 자루는 족히 넘는다. 이렇다 보니, 매일 모두 펜을 골고루 열어 써주지 않는 한, 애정예민러인 펜들은 금세 잉크가 마르고 닙에 가뭄 현상이 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만년필 세척을 정기적으로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만년필 세척이, 내게는 은근히 명상과 맞먹는 행위다. 닙을 물에 담궈 살살 기분도 풀어주고 컨버터에 남아있는 잔여물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세척하다 보면, 잡생각도 일절 안나고 온통 정신이 펜에 쏠려 최강의 집중력을 시전한다. 예전에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 또 투명한 물에 닙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퍼져나갈 때 즐기는 잉크멍은 불멍에 비교할 게 아니라는.


그렇게 세척한 펜을 깨끗한 키친 타월 위에 나란히 놓고 건조시킬 때의 기분이란. 세상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개운함이다. 기분이나 계절의 변화에 어울리는 잉크를 새로 가득 충전하고 나면, 또 그렇게 한동안 신나게 글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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