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年好與煙霞住 (장년호여연하주)
오랜 세월 안개와 노을 벗하며
拾橡供廚送朝暮 (습상공주송조모)
주워온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네
石床高枕睡陶然 (석상고침수도연)
돌평상에 누워 편히 잠드는데
有夢不飛紅塵路 (유몽부비홍진로)
꿈에라도 번거로운 속세로는 가지 않으리
放言(방언) 중에서 / 김시습
다람쥐와 멧돼지의 주식인 도토리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속세를 떠난 생육신의 밥상에도 주식으로 오른 모양이다. 식물은 인간과 동물에게 그저 베풀기만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 같은 베품으로 인해 식물은 번성했다.
셸 실버스타인의 그림우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사과나무가 한 인간에게 베푸는 아낌없는 희생의 정신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책이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될 때까지 사과나무는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몰골이 되어 베푸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은 참 많다. 참나무류의 나무들은 도토리라는 열매로써 산속의 동물들은 물론 인간에게도 아낌없이 베푼다. 도토리는 긴 겨울 동안 다람쥐의 양식이 되며, 인간에게는 흉년이나 가뭄이 들었을 때 좋은 구황식품 역할을 했다.
나무는 아니지만 세계의 2대 식량 작물인 벼와 밀도 인간들에게 아낌없이 준다. 열매인 쌀과 밀은 물론 볏짚과 왕겨, 밀기울, 밀짚 등 작물 전체가 사료와 세공 등에 이용된다.
이 같은 베품은 ‘진화는 이기적이다’는 진화론의 기본과는 분명 위배되는 일이다. 남에게 베푸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지 기회비용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아낌없이 줌으로써 그 ‘나무’들은 진화에 실패했을까.
아니다. 산에서 참나무가 가장 번성한 이유는 바로 도토리 덕분이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아 여러 곳에 묻어두지만 잘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어서 봄이 되면 도토리에서 일제히 싹이 난다.
한해살이풀인 벼와 밀의 경우 다음해의 자손 번식에 대한 걱정 따윈 할 필요가 없다. 인간들이 겨울동안 낟알을 잘 챙겨 보관하고 싹이 나면 정성스레 가꿔주기 때문이다. 세계 전체의 벼와 밀의 재배면적을 합하면 약 3억6천만 헥타르로서, 한해살이풀로서는 가장 번성한 작물이 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탄생한 사과나무 역시 사과라는 달콤한 열매로써 인간에게 길들여지며 자연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진화한 나무가 되었다.
와튼스쿨의 심리학자인 애덤 그랜트는 ‘기브앤테이크’라는 저서에서 베품의 유형을 3가지로 분류했다.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테이커(taker), 받는 만큼 주는 매처(matcher),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기버(giver)가 바로 그것. 저서에서 애덤은 셋 중 기버가 성공이라는 사다리의 맨 꼭대기를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기대수명을 높이는 요인도 우리가 얼마만큼 주느냐에 달렸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인간의 경우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산다. 원숭이 역시 암컷의 수명이 더 긴데, 암컷이 혼자 육아를 담당하는 종에서만 그렇다. 예를 들면 수컷이 육아를 담당하는 남미의 티티원숭이는 수컷의 생존 비율이 암컷보다 20%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