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나큰 트라우마를 겪으면 이전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원상복구는커녕 아예 무너져 버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삶은 질겨서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세상이 무너져도, 상실을 겪고도, 누군가는 여전히 살아가야만 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신작 <키리에의 노래>도 삶의 재건을 노래를 통해 들려주려 한다. 지친 사람을 격려하고 살아남은 자를 일으켜 세우려 한다. 키리에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늦가을 헛헛한 마음을 건드린다.
최근 한국의 상처를 소재로 독특한 스타일로 선보인 <너와 나>와 묘한 접점을 이룬다. <키리에의 노래>는 일본의 상처를 소재로 어른 이와이 슌지가 전하는 삶의 의지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길거리를 전전하는 신비로운 뮤지션
가까이 다가가 움켜쥐면 부서질 것 같은 여리고 순수한 키리에(아이나 디 엔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지만 노래를 부를 때면 찢어질 듯 거친 음색을 내지르는 길거리 뮤지션이다. 어릴 적 쓰나미로 가족을 잃고 언니의 남자친구 나츠히코(마츠무라 호쿠토)를 찾아 무작정 오사카로 향했다.
하지만 세상은 집도 절도 없는 아이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나츠히코와 재회했지만 혈육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아원을 전전하며 성장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 언어 대신 노래로 세상과 소통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우연히 종적을 감추었던 친구 잇코(히로세 스즈)와 재회한다.
잇코가 지금까지 뭐 하고 지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만난 게 어디냐며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사이 잇코는 매니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잇코의 컨설팅에 따라 자신을 상징하는 파란 옷을 입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성대를 긁어내는 허스키 보이스와 정제되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음악 스타일은 위태로운 키리에를 감싸 안으며 도시에 퍼진다.
잇코는 뛰어난 홍보력으로 키리에의 성공에 한 발짝 다가간다. 다른 뮤지션과의 협업이나 SNS 관리, 굿즈도 만들어 박차를 가하던 중 돌연 사라져 버려 걱정을 끼친다. 그 후 키리에는 또 혼자가 되어 노숙으로 하루를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나츠히코와 만나 끊어진 인연을 이어 나간다.
꿈과 이름까지 잃고 방황하는 잇코, 연인을 잃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츠히코의 안타까운 사연이 덧씌워지자, 흔들리는 청춘의 초상이 완성되어 간다.
179분 감독판이 절실하다..
<키리에의 노래>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디렉터스 컷 버전(178분)을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뮤직비디오, 광고 등으로 실력을 쌓았던 이와이 슌지의 센치함이 그대로 살아 있다. 섬세한 영상미와 발군의 음악 선곡, 아름다운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황홀감을 맛볼 수 있다.
이번에는 동일본 대지진을 소재로 가족과 연인을 잃고 상처 입은 영혼을 희망의 노래로 치유하고 있다. ‘키리에’는 언니의 이름이자 가톨릭에서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기도다. 작중 성가대가 미사곡을 부르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세 남녀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빛을 내며 불타오르는 별처럼 반짝인다. 키리에와 잇코의 관계는 <하나와 앨리스>가 떠오른다. 오프닝과 클로징의 눈밭 장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해프닝은 <러브레터>가 겹친다. <키리에의 노래>가 밝은 분위기의 화이트, 어두운 분위기의 블랙 이와이 세계관의 중간계 작품이라 할만하다. 마이너한 감성과 대중적이지 않은 예술적인 스타일을 기대한다면 추천한다.
첫 연기 도전에 1인 2역을 소화한 ‘아이나 디 엔드’의 다듬어지지 않은 연기가 압권이다. 아이유가 떠오르는 매력적인 얼굴로 밴드 ‘BiSH’ 출신으로 핫한 싱어송라이터로 떠오르고 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키리에 그 자체가 되어 말 못 할 아픔을 노래로 표현하는 연기를 펼쳤다.
또한 일본 아이돌 그룹 ‘SixTONES’의 멤버이자 <스즈메의 문단속> ‘소타’ 목소리를 연기한 ‘마츠무라 호쿠토’와 국내외 팬층이 두꺼운 ‘히로세 스즈’가 합류했다. 감독 시그니처인 청춘의 찬란함을 이번에도 꾹꾹 눌러 담았다. 이와이 슌지 월드의 소년, 소녀의 총집합 같다.
다만, 불친절한 서사가 걸림돌이다. 주인공의 1인 2역 연기, 여러 시간대를 오가는 비선형적 구성이라 자칫 흐름을 잠시라도 놓치면 따라잡기 쉽지 않다. 극의 몰입을 방해하고 인물과 상황의 혼란을 가중한다. 뮤직비디오를 길게 보는 듯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은 수려하나, 좀 더 음악을 듣고 싶어질 때쯤 끊겨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음악과 영상이 이야기를 삼켜 버리고야 마는 셈이다.
극장 개봉한 119분 버전은 1시간을 드러낸 편집본이다. 부산에서 선보인 3시간짜리 감독판이 사족이라 불리지만 오히려 절실해진다. 이해되지 않는 캐릭터와 관계의 개연성 부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