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벗겨지는 트라우마.. 여성의 해방감
지방 무대를 전전하던 제닌(아만다 사이프리드)은 스승 찰스의 유언으로 오페라 살로메의 연출을 맡게 된다. 초연을 그대로 재연하는 데 그칠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할지 고민이 크다. 사실 찰스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제닌은 살로메의 각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내적 충돌을 경험한다. 과거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던 경험, 이를 방관하던 어머니의 행동과 묘하게 겹치며 갈등에 휩싸인다.
한편, 재닌은 남편과 딸, 아픈 어머니와 간병인을 두고 오페라 연출을 맡아 멀리 출장 왔다. 하필이면 어머니의 생일날 남편과 간병인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 이 문제를 떠올린 시간도 없이 약속한 공연까지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하기만 하다.
그 와중에 소품 담당 클리아(레베카 리디아드)가 요한을 연기한 오페라 배우(미셸 쿠퍼- 라데츠키)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고발하겠다는 클리아의 행동에 오페라는 위기를 맞고 오랫동안 봉인된 트라우마가 다시 고개를 들며 제닌을 위협한다. 결국 제닌은 제작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본을 수정하기에 이르고, 자신만의 <살로메>를 완성해 나가며 진정한 해방을 맞는다.
오페라 ‘살로메’ 이해 필요
<세븐 베일즈>는 오페라 <살로메>를 재연하는 과정에서 제작진, 배우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감독의 트라우마가 폭발하는 영화다. 작품에 몰입하면 할수록 억눌렸던 어두운 과거가 떠오르며 살로메와 본인을 동일시하게 된다. 제목은 오페라 <살로메>의 대표적인 명곡이자 유혹의 춤 ‘일곱 베일의 춤’에서 따왔다.
살로메 이야기는 영화 <감각의 제국>과 비슷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복형을 죽고 형수와 결혼한 헤롯왕. 이를 반대했던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복역 중이다. 어느 날 의붓 딸 살로메는 요한에게 단숨에 반하고 맹렬히 그의 키스를 원했지만 거부당한다. 화가 난 살로메는 극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헤롯왕과 거래한다. 헤롯왕은 내 앞에서 춤을 춘다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살로메는 일곱 베일을 벗으며 에로틱한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을 얻는다. 살아서 가질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가지겠다는 살로메는 결국 시체와 키스에 성공한다. 이를 보다 못한 헤롯왕은 살로메를 처형한다.
살로메 이야기는 성경에서 발췌되었으나 상상으로 각색된 허구다. 성경에 헤롯왕은 등장하나 딸의 이름이 없고 세례 요한을 유혹했다는 기록도 없다. 지금의 틀은 탐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1893)을 바탕으로 최초로 완성되었으며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905)를 통해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이후 수정주의 연극 개념에 근거해 다양하게 재해석 되었으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남성 살로메가 등장하기도 했다. 작품은 성(性), 정치, 권력, 가족, 윤리적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문제작이다. 근친상간의 은유, 참수와 시체 성애, 나체 퍼포먼스 등 센세이셔널한 내용으로 길티 플레저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기괴한 행동과 패륜적인 인물, 선정적이고 파격적인 설정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27년간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다층적 심리묘사가 오히려 독
영화는 특이한 구석이 많다. 일단 양파 껍질 같은 다층적 심리 묘사가 집중력을 요구한다. 주인공 제닌과 감독 아톰 에고이안의 공통점이 느껴진다. 감독은 캐나다 오페라단과 오페라 <살로메>(1996) 초연 이후 2002, 2013, 2023년 총 네 번의 공연을 올리게 된다. 2023년에 재공연 요청을 받음과 동시에 영화 시나리오 작업까지 겸하며 <세븐 베일즈>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과연 예술이라는 명목 아래 원작의 비틀거나 재해석하는 행위의 의미,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이집트 출신이자 아르메니아계 이민자의 디아스포라 고민까지 더해졌다. 오래된 이야기를 현대에도 똑같이 재연(再演) 하는 게 맞는지,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낡은 가치를 수정하는 게 맞을지, 선택의 위치에 놓인 고뇌가 영화 속에 담겼다.
하지만 소수만 공감할 이야기다. 감독 개인의 경험을 녹여 낸 시나리오는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캐릭터의 서사가 중구난방이다. 공적 업무와 개인사가 충돌을 일으키는 불협화음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져 피로감을 부른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비선형적 플롯, 산발적인 인서트(공연 실황, 제작기, 인터뷰, 영상통화, 플래시백)와 내레이션 등이 문제다. 복잡한 인물 관계와 감정선이 뒤섞이면서 혼란을 가중한다. 라이브 연극과 영화의 융합, 무대와 매체, 과거와 현재, 개인과 대중의 경계를 허무는 색다른 시도지만 불친절하다. 극중 오페라의 이해를 위해서는 사전 공부가 필수다. 살로메를 아예 모르거나 무대 공연의 시스템적 이해가 없다면 호흡을 따라가기에 버겁다.
그럼에도 무대 뒤 다양한 스태프를 만날 수 있어 신선했다.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가 등장해 성행위 연기 방향에 대해 지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베드신 연출 조력자로 성애, 노출, 출산, 목욕, 수술 등 배우가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게 도와준다.
그밖에 공연 배우가 대체될 경우를 대비해 연습해 두는 언더스터디(understudy)도 다룬다. 소품 담당자가 요한의 참수된 머리를 조각하거나 석고를 뜨는 장면을 삽입해 이해를 돕기도 한다. 제닌을 연기한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내면 연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하며 성장까지 쌍끌이 한 여성의 욕구 표출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다.